B-25. 다윗 왕의 가묘

다윗 왕의 가묘

다윗의 가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윗의 무덤 앞쪽에 있는 휘장, 오른쪽이 다윗의 가묘 출입구

시온 산에 있는 “최후의 만찬 기념 교회(Coenaculum)”의 1층에는 “다윗의 가묘(가짜 무덤)”이 있는데, 이곳이 다윗 왕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었다고 알려진 것은 십자군 시대가 끝난 이후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곳이 다윗 왕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인정되었지만, 그 기원은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신 곳,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이곳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했던 이곳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면서 구원의 도시인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인 “시온” 즉, “거룩한 시온”으로 인식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겐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시온”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BC 1,000년경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오벨 산 언덕위에 도시를 세운 다음, “다윗의 도성”이라고 불렀으며(사무엘 하 5:9), 키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이 다윗의 도시로 옮겨와서(사무엘 하 6장) 정치적, 종교적인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솔로몬 왕이 통치할 때에 다윗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현재의 바위 돔 사원(Dome of Rock)이 서있는 곳인데, 이곳은 (창세기 22:1-19)의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인 모리아 산까지 도시가 확장 되었습니다.

BC 7세기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공격해 왔을 때(역대하 32:1-23)의 예루살렘 도시 규모는 솔로몬 시대의 3배 정도로 커졌지만 유대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지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초기 솔로몬 시대의 규모보다(다윗 도성과 바위 돔 사원까지의 규모) 작아졌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 도성의 규모는 축소되고, 또 다시 확장되는 과정을 되풀이 하게 되었습니다. AD 7세기에 페르시아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게 되었을 때, 시온 산과 원래 다윗의 도시 터가 있었던 곳이 예루살렘 성곽 밖으로 나가게 되었었는데, 1539년 오스만 터키가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 및 재건을 하였던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 상 2: 10)을 보면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다윗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빼앗아 도성으로 삼았던 ‘다윗 성’은 키드론 계곡과 티로포에온(Tyropoeon) 계곡이 만나는 오펠 산에 위치한 작은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성”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중심 공동체가 있던 “새로운 시온”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또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다윗의 무덤이 마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이미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이곳에서 거룩한 왕인 다윗을 기념하는 전례를 거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곳, 즉 시온 산에 다윗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는 전승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가톨릭의 프란체스칸들이 1335년에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을 지으면서 다윗 왕에 대하여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2:29)”는 내용을 확증하며 기념 성전의 1층에 “다윗 가짜 무덤”을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의 가묘 (남자들이 들어 갈 수 있는 부분)

다윗 왕의 가묘 (여자가 들어 갈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족이(1517년)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한 후, 최후의 만찬 기념 교회와 수도원은 다윗을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명으로 공경하는 오스만 터키 관리들에게 빼앗겼고, 최후의 만찬 기념교회 자리는 1552년에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수도원 건물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 손으로 넘어갔고, 1층은 다윗의 무덤과 유대인 회당과 탈무드 학교를 만들었고, 2층의 성령강림 예배당은 폐쇄시키고 최후 만찬 기념 교회당만 개방 하여 방문객들에게 들어 갈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 강림 기념 예배당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에 성만찬을 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과 성령강림일 동안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현재 다윗의 무덤은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지만,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공경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유대인들에게는 통곡의 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성지가 되었습니다.

1951년에 다윗의 무덤이 있는 곳에 고고학적인 발굴 작업을 하였고, 초대교회 시대의 건축물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유대인들의 회당을 발굴하여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 전승들의 흐름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윗 왕의 가짜 무덤을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여성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마련하여 놓았고, 오른 쪽으로 들어 가면 남성들만 이곳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마련하여 놓았습니다.  여성은 머리를 가릴 수 있도록 스카프 같은 것을 써야 하며, 남자는 키파라고 하는 머리의 정수리를 가릴 수 있는 조그마한 모자를 써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시온 문 밖에 위치한 다윗 왕의 무덤은 가묘(가짜로 만들어 놓은 무덤)입니다.  실제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사무엘하 5:7, 열왕기상 2:10) 다윗 왕은 다른 유대 왕들과 함께 다윗성 안에 안장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 이스라엘 왕 41명의 무덤 중에 위치가 확인된 것은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구약 성서에는 다윗 왕의 무덤이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 다윗 왕의 가묘가 있는 곳은 예루살렘 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37-100)의 기록에 따르면, 헤롯왕이 다윗의 무덤을 도굴하고자 했으나 내실까지 도굴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다윗 왕의 무덤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인의 바 코흐바 반란 (Bar Kokhba revolt , AD 132-135) 당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 후 다양한 장소가 다윗 왕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추측되었는데, 그 중 오늘날 시온 산으로 불리는 곳에 다윗 성이 있었으며, 그곳에 무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10세기 무렵부터 대중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098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의 것이며, 1172에 스페인계 유대인인 투델라(Tudela)의 랍비 벤자민(Benjamin)이 시온 산에서 다윗 왕의 무덤을 기적적으로 발굴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1176년에 십자군이 다시 수리한 마가의 다락방 아래층에 다윗 왕의 무덤이 모셔져 있고, 이 다윗 왕의 무덤은 고딕 양식의 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실 가운데는 길이 2 m, 폭 1 m 정도의 석관이 놓여 있습니다. 석관에는 백합이 새겨져 있으며 “이스라엘 왕 다윗이 살아서 여기 있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와 다윗의 별이 수 놓아진 천으로 덮여있습니다.

2층의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층은 다윗의 가묘가 있는 곳입니다.

다윗 왕의 무덤과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이 건물의 3 층에는 무슬림의 첨탑이 세워져 있고, 그 첨탑에서는 무슬림의 기도소리가 하루에 다섯 번씩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건물의 1층은 유대교의 성지이고, 2층은 기독교의 성지이며, 3층 옥상 발코니는 모슬렘이 사용하고 있어서 3 개 종교의 성지가 한 건물에 함께 있는 곳입니다.

이 건물의 옥상에는 작은 방이 하나있는데 1967년 전까지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제 2 대 대통령이었던 Izaac Ben Zvi의 휴식처가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전부 점령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경계선이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시간: 겨울; 일요일~목요일 08:00~17:00 금요일 08:00~13:00 토요일 08:00~18:00
여름; 일요일~목요일 08:00~18:00 금요일 08:00~14:00 토요일 08:00~18:00
입장료: 무료

최후의 만찬 수도원

시온 산은 335년 골고다와 예수님 무덤 위에 “성묘 교회”가 지어지기 전까지 예루살렘의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AD 4세기 초, 시온 산위에 지어졌던 교회는 AD 614년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후 십자군 시대에 다시 최후의 만찬 기념교회(Coenaculum)가 지어졌지만 다시 이슬람에 의해 파괴 되었습니다.

그 후 폐허가 되어있던 이곳을 1333년 나폴리 왕이 이집트 술탄으로부터 매입하여 작은형제회(프란체스코회)에 봉헌 하였고, 작은형제회(가톨릭의 프란체스코회)에서는 이 부지에 수도원과 고딕식 양식으로 2층 기념 교회를 건축하였으며 그곳을  “최후의 만찬 기념교회(Coenaculum)”라고 불렀고, 이곳 수도원을 2백여 년 동안 본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기념 교회는 1551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빼앗겼고, 기념 교회는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수도원 건물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 손으로 넘어갔고, 1층은 다윗의 무덤과 유대인 회당과 탈무드 학교를 만들었고, 2층의 성령강림 다락 방은 폐쇄시키고 최후 만찬 기념 성당만 개방 하면서 성만찬을 하신 날과 성령강림 주일에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작은형제회에서는 1936년, 원래의 기념 성전 터 바로 옆에 부지를 구입하여 오늘날의 최후만찬 기념 성전과 수도원을 지었고,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최후의 만찬 및 성령강림 기념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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