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4.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건축되어진 정교회 대성당이었습니다. 이 교회당은 AD 36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을 때,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제정하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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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60년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에 의해서 첫 번째로 건축되어진 성 소피아 성당은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들)때 반란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그때에 화재로 불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부인, 유독시아는 행실이 부정하였고 황제를 존중하지도 않았으며 사치가 매우 심하였지만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그녀만을 사랑하였습니다.

대주교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황실의 사치와 유독시아의 부정한 행실, 극장 무대의 외설적인 공연들을 좋아하는 등의 부정한 면을 비판하였다가 마침내 유독시아에 의해 AD 404년 6월 20일 폰투스(흑해지방)으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대주교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를 존경하며 그를 따르며 지지하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 사건이 있을 때, 이곳에 첫 번째로 세워졌던 성 소피아 성당은 불타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로 건축되어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년)에 의해 415년 10월 10일 완공 되었습니다. 이 때에는 지금 볼 수 있는 돔(Dome) 건축 기법이 아닌 바실리카 양식(직사각형 건물)으로 지어졌었습니다. 현재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게 되면 왼쪽에 있는 터에 두 번째로 건축되어진 성 소피아 성당의 유적들이 남아 있어서 볼 수 있도록 진열하여 놓았습니다.

Hagia Sophia 입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콘스탄티노플을 3중 성벽으로 쌓았던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성당”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 두 번째 성당은 “니카의 반란”으로 소실되었습니다. 니카(Nika, 그리스 승리의 여신)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527~565년)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전차경주는 지금의 유럽인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처럼 대중적이고 큰 오락거리였습니다.

로마의 정치를 대변하는 말로 “빵과 서커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로마 황제들은 시민들의 지지도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그 인기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전차 경주는 필수였던 것입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경주가 상당히 발달했고 인기를 끌었으며, 큰 도시에는 대부분 히포드롬이라고 부르는 원형경기장이 있었습니다. 영화 “벤 허”를 보면 전차 경주의 장면이 나오는데 그와 같은 경주를 말합니다. 말들이 끄는 전차경주는 각각 다른 색의 옷을 입고 경주하였으며, 4 개의 팀으로 나뉘어져있는 경우가 보통이었지만, 비잔틴 시대에는 녹색 옷을 입고 경주하였던 녹색 Team과 청색 유니폼을 입고 경주하였던 청색 Team이 있었습니다.

녹색 Team을 응원하는 녹색당과 청색 Team을 응원하는 청색당, 이렇게 두 당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각각 큰 파벌을 이루고 오늘날의 정당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그리스-로마 귀족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전통 기독교인들이 많았는데, 녹색당은 상인, 기술자 등과 같은 중간 계층이 주로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할 당시 청색당을 지지를 입은 바가 컸지만 자신의 공권력이 튼튼해지자 녹색당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청색당도 소홀히 대하였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시민들의 불만이 점차 높아질 때, 532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에서 벌어진 전차경기가 끝난 후 청색당과 녹색당이 서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황제는 즉각 군대를 투입해 무력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충돌 사태의 책임을 물어 청색당과 녹색당의 지도자를 처형하고 감금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유스티아누스 황제를 반대하는 양쪽 세력이 서로 힘을 합쳐 시위를 벌린 것입니다.

충돌 사태가 다시 진정되고 사흘 뒤 전차경주가 재개되었으나 성난 군중은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황제를 향해 승리를 의미하는 “니카!” 를 외치며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황제는 피신하고 경주를 중단시켰지만 군중은 더욱 화가 나서 경기장을 뛰쳐나와 폭도들로 변하여 감옥을 부수고 관리들의 집에 무차별 방화를 하는 등의 폭력 시위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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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발생한 화재로 하기아 소피아 성당까지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 잔해가 지금의 소피아 성당의 서쪽 입구 지하 2 미터 아래에 남아 있습니다. 폭동은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황제는 군중의 요구대로 관리들을 경질했으나 폭도로 변해버린 군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황제와 측근들은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황후 테오도라가 회의장에서 황제를 꾸짖으며 당당히 맞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녀는 황제로서 부끄럽게 도망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은 끝까지 황궁을 지키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녀의 뜻을 굽히지 않은 황후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제와 그의 측근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란진압을 모의하였으며, 젊은 장군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라는 장군을 세워서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 장군은 몰래 군대를 이끌고 히포드롬으로 가서 군중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출구를 막고 동시에 무차별로 군중을 학살하면서 무력으로 진압한 것입니다. 이 때 그는 경기장안에서만 약 3만 명의 군중을 학살하였습니다.

“니카(Nika)” 반란으로 인하여 불타버린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화려하고 거대하게 다시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부인 데오도라(Theodora)는 원래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극장 히포드롬에서 공연하던 서커스단의 무희였습니다. 그녀는 당시 부루(Blue, 청색당) 서커스 단에 소속된 무희였는데 한 고위 관리의 정부(情婦)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고위 관리가 북아프리카로 부임하게 되자 그를 찾아 북아프리카로 따라 갔으나 그 고위 관리가 그녀를 만나주지 않자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여행경비가 없어서 그 경비를 마련하고자 그곳에서 몸을 파는 일을 하였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성직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인도로 그녀는 신실한 크리스쳔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춤을 추고 몸을 파는 일을 청산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와서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 때 한 부루(Blue)회원의 소개로 유스티아누스 황제를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때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지게 되어, 그녀를 왕의 후궁이나 첩으로 두어도 되는데, 중신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굳이 정비(正妃)로 맞아들이기 위해 국법을 고쳐가면서 그녀를 황후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그의 통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사실 “니카” 반란 사건이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왕비였던 데오도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니카” 반란 사건이 있었을 때에, 반란군으로부터 위협을 느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던 황제 유스티아누스를 독려하여 폭동을 진압하는데 커다란 동기를 마련하여 준 것도 왕비 데오도라(Theodora)였습니다.

두 번의 파괴를 겪은 성 소피아 성당은 이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소피아 정교회 성당의 재건을 결정하여,  당대 최고의 수리물리학자, 변호사, 건축가인 설계자 안테미우스(Anthemius)와 포물선 이론 창안하였으며 컴퍼스를 활용하는 기하학, 수학자이며 구조물 전문가이고. 탁월한 엔지니어였던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Isidorus)에게 그 설계를 맡겼습니다.

공사는 5년 11개월이라고 하는 단기간에 종료되어, 537년 12월 27일에 헌당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첫 예배를 드리던 봉헌식 날, 건물의 웅장하고 찬란한 자태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솔로몬 왕이 심혈을 기울여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더 장엄하고 훌륭하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는 외침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여 그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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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있는 돔의 지름은 동서로 31 미터, 남북으로는 33 미터이며 이 돔에는 40개의 창문이 나 있는데,이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고 있는 빛이 성당 내부를 밝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유리가 없었으므로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빛이 통과하도록 만든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하여 빛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게 되면, 돔 주위에 있는 40개의 창문 가운데 4개 정도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10세기경에 아야 소피아 성당을 보수하였을 때, 얇은 대리석 판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1,000번 이상의 지진이 있었을 때마다 약간의 보수공사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약 1,500년을 지내 오면서 이탈리아 로마의 판테온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온 고대 건물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서 재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방정교회 제일의 격식을 자랑하였으며, 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가족들과 귀족들이 예배드리는 예배당으로 이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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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차 십자군 전쟁이 있기 이전에 기록되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지금은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많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였던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 의하면, 아야 소피아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 처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노아의 방주의 문”이나 “예수의 십자가”, “아브라함의 테이블” 등 수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보관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쿠르트 족의 후예인 “살라딘(Selah addin)”은 이슬람의 장군이 되어 제 3 차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이때 그는 십자군에 의하여 정복당하였던 성지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 아래로 빼앗아 오자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슬람에게 다시 빼앗겼던 성지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로마 가톨릭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을 다시 모집하여 제 4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십자군의 병력을 이탈리아의 베니스로부터 배로 이스탄불 근처에 상륙 시킨 후에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매우 가난하였던 유럽의 십자군 군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함을 보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진군을 하는 대신에, 화려하고 풍요로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한편 왕위 쟁탈 싸움으로 인하여 국력이 약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치를 의욕조차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비잔틴 왕국은 1204년 십자군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은 역사상 가장 처참한 약탈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수많은 성물들이 파괴되고 도난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십자군 군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기록으로 남겼던 역사가 빌레할두인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군인들은 군복 위에 수놓아진 십자가의 의미를 잊은 채, 성당들을 불 지르고 학살을 일삼았다. 궁전과 정부 건물은 완전히 약탈당하였고, 십자군은 가정집까지 약탈하면서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하였으며,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물건까지도 심지어 비가 올 때 입는 우비까지도 약탈하였다.”

십자군은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 눈을 돌려, 벽에 붙어있던 장식들을 떼어가고 예수의 제자와 사도들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모든 물건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사용되었다고 하는 못, 가시 면류관, 금과 은으로 장식된 십자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수녀들은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소피아 성당을 모두 약탈한 후, 십자군들은 잔치를 열면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던 강단에 프랑스 창녀들을 세우고 음란한 노래와 춤을 추게 하면서 십자가가 새겨진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술에 취하여 흥청거렸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본 역사가 니케타스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왔던 그들은, 금과 은을 위해 십자가를 서슴지 않고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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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게 된 뒤 배경에는 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이었던 “엔리쿠스 단돌로스”가 있습니다. 그는 막강한 그의 재력으로 십자군의 출전을 도왔으며, 십자군을 부추겨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도록 하게 한 장본입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 갔을 뿐만 아니라 아야 소피아에 있었던 성물들을 약탈하여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을 꾸미는데 사용하도록 하였던 장본인입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데 공을 세운 공로자로써 그가 죽은 후, 아야 소피아에 묻힐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261년 비잔틴 제국이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게 되었는데, 시민들은 아야 소피아에 있었던 단돌로스의 석관묘를 파헤치고 그의 유골을 꺼내어 거리의 개들에게 던져 줌으로써 복수하였습니다. 지금은 그의 석관이 있었던 성당의 2층 그 자리에, 유명한 모자이크 “이시스”가 있는 건너편에 석비로만 남아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물건들을 십자군 군인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행방불명되었으며, 일부분은 바티칸에, 또 다른 일부분은 다른 종교적인 주요 도시들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히포드롬의 조각품들, 성인들의 뼈, 토리노에 보관되어 있는 예수님의 수의, 그리고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4개의 청동 기마상들도 십자군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약탈되었던 것들입니다.

비잔틴의 사람들은 이 십자군 군인들이 이곳에서 저질렀던 일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오스만 투르크(오토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였을 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는 풍전등화와 같은 순간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말하면서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아야 소피아에서 추기경을 보는 것보다 무슬림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

세 번째로 세워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건축된 이 후, 이 건축물의 건축양식은 기독교 교회의 건축물의 교과서와 같은 전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터키 시대에 이슬람 모스크를 건축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 중심, 또는 제사장이나 황제, 군왕 등 소수의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생각하여, 그 소수의 특수계층들만 하나님의 임재 장소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설계된 바실리카(직사각형의 건물) 형태로 사원이나 교회당을 건축하였기 때문에, 제단을 저 앞에 두는 모양으로, 길다란 직사각형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까운 곳(제단)으로 다가가서 하나님에게 직접 기도드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되었는데,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이러한 기독교도들의 의중을 반영하여 건축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건축 양식은 “중앙 집중 형태의 교회 건축물”의 표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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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의 특징은 시선을 압도하는 중앙 돔(Dome)과 대리석, 그리고 모자이크를 들 수 있습니다. 대리석 기둥들은 고대 신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을 가져온 것과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동로마(비잔틴)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거대한 원기둥들을 가져와서 사용하였습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터에 가면, 실제로 아무 것도 남겨져 있지 않아 그 잔해들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한개의 남아 있는 돌기둥이 서 있을 뿐입니다.)

반암(盤巖, Porphyry)은 황제의 돌이라고 불리는 만큼 아름다운 초록빛과 붉은 보라색을 띠는 돌인데, 6세기 때는 이미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채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사용되어 있는 것들을 가져와 재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대리석 기둥 위에 있는 주두(기둥머리) 부분은 흰 대리석으로 아칸서스 나뭇잎들이 물결치듯 흔들리는 모양(코린트 양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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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리석들은 모두 마르마라 섬(마르마라 바다 위의 가장 큰 섬, Proconnesus)에서 채석한 것입니다.그래서 “마르마라 대리석”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또는 대리석 자체를 “마르마라(Marmar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건축하면서 자기 이름과 왕후의 이름을 그곳에 남기고 싶어서 코린트식 기둥머리 위에 황제(유스티니아누스)와 황후(테오도라)의 표식(모노그램)을 남쪽 본당 1, 2층 기둥들 가운데에 새겨 놓았습니다. 아칸서스 나뭇잎들이 황제(황후)를 향하여 일제히 절을 하는 듯 바람에 날려 굽어 있는 모양입니다.

기둥머리(Capital)의 왼쪽에 있는 모노그램이 “Theodora 황후”의 것이고, 오른 쪽에 있는 모느그램이 “Justinianus 황제”의 것입니다.

AD 730년, 교황이었던 레오 3세(Λέων Γ΄)가 모세의 십계명 중 우상숭배 금지하는 내용을 내세워 성상(Icon)을 파괴할 것을 내용으로 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동로마 제국 전역에 “성상 파괴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비잔틴 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이 서로 얽혀서 결국에는 동서 교회의 분열, 즉 기독교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서로 갈라서는 최초의 교회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상 파괴운동”이 전재되고 있는 동안, 성상 파괴론자와 성상 옹호론자가 죽고 살기로 갑론을박 하는 사이, 비잔티움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를 장식하였던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 예술품들이 훼손되거나 철거되고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성상 파괴 운동의 광풍은 아테네의 이레네 여제(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가 제 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일단락되었으며, 하기아 소피아에는 그때까지 파괴되지 않았던 성상과 성화들이 지금까지 그 모습들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잔틴 성상 파괴 운동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198년에 로마가톨릭의 교황이 된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 원정을 재개할 것을 선포하고 제 4차 십자군을 모집하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이사키우스 2세가 그의 형인 알렉시우스 3세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긴 사건입니다. 이때 이사키우스 2세의 아들 알렉시우스(큰아버지와 이름이 같으며 나중에 알렉시우스 4세가 된다)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도망쳐 십자군에게 아버지의 복위를 얻기 위해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젊은 알렉시우스는 십자군과 베네치아 왕국에게, 자신의 큰아버지를 내쫓고 자신을 제위(황제의 자리)에 올려준다면 십자군의 전쟁 비용을 제공함과 동시에 자비로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성지에 주둔시킬 것이며, 또한 콘스탄티노플 교회(동방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마 가톨릭)의 관할 아래에 두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제 4차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로마 가톨릭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성지를 점령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군대을 모집하였습니다. 원래 제 4차 십자군의 목표는 이슬람 세력의 본거지가 되어 버린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쟁의 목적이,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변질되어 나중에는 세속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으로 바뀌면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슬람에게 빼앗겼던 기독교 성지들을 회복하기 위해 먼 길을 진군하여 왔던 십자군들은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기독교 중심 도시였던 큰스탄티노플을 파괴하였습니다.

제 4차 십자군 전쟁을 위하여 출전을 앞 두고 있었던 십자군은, “십자가 앞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땅을 통과할 것이며, 오로지 이교도를 상대로만 하여 무기를 들 것이며, 신성한 과제를 수행하기 전까지는 육체의 욕구를 금할 것”이라고 맹세를 한 바 있었지만,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부유함과 그들의 욕심 앞에서 모두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찬란하였던 비잔틴 문화의 문화재와 보물들과 성물들이 십자군들에 의해서 약탈당하였습니다. 이 때의 약탈은 세계사에서 단 한번 있었던 사건으로써 가장 처참한 문명적 재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격하라는 이슬람 세력은 공격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점령한 십자군은,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대에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때 십자군의 약탈로 인하여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고 말았을 정도였습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들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하여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보관되어 왔던 각종 진귀한 성물들이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비잔티움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악마에 비교한다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습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은 하기아 소피아 정교회 대성당을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26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그때까지 황폐해진 하기아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고,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교회당 건물을 새롭게 증축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힘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아야 소피아 성당의 관리가 점점 소홀하여 졌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 함락되기 전에 아야 소피아 성당을 방문하였던 기록에 의하면, 아야 소피아가 한심스러울 정도로 소홀히 취급되어 폐허로 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기 전,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서로마 제국과 병합하려는 계획에 대하여 동방 정교회 회중들은 항의하면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교회에 모이지 않는 방법으로 항의하였습니다. 이때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하여  아야 소피아 성당의 존재와 필요성은 점점 잊혀져 가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방 정교회의 회중들로부터 아야 소피아 정교회 성당은 예배당으로써의 모습이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기도를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스만의 군인들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 아야 소피아 성당에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다시모여 기도를 시작하였지만, 그 다음 날 새벽 오스만의 군대가 아야 소피아에 도착하면서부터 이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던 기도소리는 지금까지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동방 정교회 성당의 1,000년 동안은 교회(동방 정교회)로, 또 500년 동안은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되다가 193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곳은 예배를 드리는 성당이 아니라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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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말년에는 속명론적인 예언들이 많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언젠가는 제국이 멸망하게 될 터인데 그때에는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와 같은 이름(콘스탄티누스)을 가진 사람이 황제가 될 때,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또한 달이 차 있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함께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그 해의 5월 24일에 보름달이 떠서 이제 달이 기우는 일만 남아 있었을 그때에 하필이면 그 날 밤에 월식이 일어나는 바람에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불안에 떨면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국민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동방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던 오스만의 이슬람 교도들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왕국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목표로 하여 1453년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에 관련된 예언들을 떠올리면서 불안해 하며 불길하게 여겼습니다.

1453년 5월 25일, 그날에는 폭우가 쏟아 지고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5월 26일는 아주 짙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엎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고 있었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도시를 떠나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짙은 안개가 도시를 덮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짙은 안개 속으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이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고 하면서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모든 병력의 총공세가 시작된 5월 28일,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향해 이교도가 3중 성벽을 넘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하여 빛나는 검으로 그들을 지옥 불에 던져 넣을 것이다”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3중 성벽을 뚫고 들어 와서 도시를 완전히 점령한 오스만 병사들이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몰려들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 문을 굳게 닫으면서 저항하였지만 얼마 못가서 병사들이 청동 문을 때려 부수고 성당 안으로 난립하여 들어 왔습니다. 반항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성찬예배를 집전하던 사제들은 지성소에서 끌려 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전설 하나가 그곳에 남겨지면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문은 굳게 닫히게 되는데, 그 전설의 내용은, 최후의 순간에 몇몇 사제들이 성반과 성배를 들고 대성당의 벽 너머로 사라져버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라졌던 사제들이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이슬람의 모스크에서 다시 대성당으로 바뀌는 날, 다시 나타나서 이때 마치지 못하였던 성찬예배를 마치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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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멧 2세의 초상화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쪽에서 힘을 기르기 시작하였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오토만 제국)의 무라드 2세가 1451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메흐멧 2세가 19세의 젊은 나이로 술탄이 되었습니다. 술탄으로 등극한 메흐멧 2세(아흐멧 2세)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관료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면 또 다른 십자군 원정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하여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메흐멧 2세는 선왕들의 유업을 달성하고자 결심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와 유럽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술탄 메흐멧 2세는 비잔틴 제국과 유럽과의 군사적 연계를 차단하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비잔틴 정복은 무슬림들의 영광스러운 사명감을 완수하는 종교적인 이유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아나돌루 히사르와 루멜리 히사르 사이는 보스포러스 해협 중 가장 폭이 짧은 지역으로 그 거리가 겨우 700여m 밖에 되지 않아 선박이 대포의 사정권을 피해 통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곳입니다. 메흐멧 2세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나돌루 히사르 맞은편에 루멜리 히사르(1452년)를 축조하고 대포를 배치해 흑해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제공되는 원조의 길을 차단하였습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러한 풍전등화에 놓인 제국의 위기에 콘스탄티노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서방측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일이었는데 서방측의 원조를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커다란 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서로 갈라져 있었던 기독교의 통합이었는데, 말이 통합이지 비잔틴의 동방정교회로서는 1,000년의 전통을 지켜온 종교적 자존심을 버리고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여야 했기에 이 문제는 비잔틴 제국 내에 커다란 분열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시민들과 성직자들은 교회 통합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어떤 타협도 진전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보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유럽의 원조를 얻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1452년 12월 12일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해 겨우내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임박한 오스만의 공격에 대비하여 식량과 군수품을 비축하고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는 전투를 할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의 수는 7,000 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외부의 원군이라고 해야 제노바에서 보낸 700명의 용병들이 전부였습니다.

오스만의 메흐멧 2세는 1453년 초봄, 전군 10만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였습니다. 2만명의 선발대가 4월 2일 부활절이 낀 주의 월요일에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이 보이는 지점에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메흐멧 2세가 직접 이끄는 8만에 이르는 병력이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르반의 대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우르반의 대포

4월 6일 헝가리의 대포 기술자 우르반이 제작한 우르반 대포를 동원한 첫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르반 대포는 대포의 포신은 40 뼘(8.2 m)이었고 청동의 두께는 한 뼘(20 cm)이었으며, 포탄 한 개의 무게는 609 kg 으로 최장거리 1.6 km 까지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대포를 운반할 때에는 황소 15 마리가 끌었다고 합니다. 이 대포는 3중으로 된 콘스탄티노플의 육지성벽을 뚫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전에 제 4차 십자군 전쟁이 있었을 때 십자군들이 해안 쪽 성벽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한 적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때까지 육지 쪽의 3중 성벽을 통해서는 1,000년 동안 어떠한 외적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우르반 대포는 지축을 울리며 연일 성벽을 향해 공격을 하였고,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밤마다 대포의 공격으로 인하여 파괴된 성벽을 복구하는 작업을 하면서 밤을 보내었습니다.

4월 20일 제노바와 시칠리아에 온 함대가 마르마라 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배에는 로마의 가톨릭 교황이 보내준 무기와 식량이 실려 있었습니다. 술탄 아흐멧 2세는 그 배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곧바로 작전명령을 내렸고,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배들이 출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측의 배들은 오스만의 함선에 비해 수적으로는 열세에 있었지만, 함선의 크기와 월등한 항해 전술에 힘입어 오스만의 함대들에게 많은 타격을 입히고 무사히 콘스탄티노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의 압도적인 승리로 콘스탄티노플은 값진 식량과 무기를 보급 받았지만 그것이 콘스탄티노플이 받았던 마지막 원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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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로 배를 옮겨 내항으로 들어가고 있는 오스만의 군함들.

골든 혼과 페라 지구(갈라타 지구) 사이에 비잔틴 군이 바다 속으로 쳐 놓았던 쇠사슬 때문에 골든 혼을 따라 내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다를 장악하지 못하여 해전에서 실패를 하였던 것을 알게되었던 오스만의 술탄은 마침내 묘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톱하네부터 시작하여 해발 61 m의 갈라타 탑 뒤를 돌아 육지를 통하여 배를 옮기는 작업으로 넘어가서 카슴파샤 항구로 배(군함)들을 옮기는 작전이었습니다.

4월 23일 새벽 그 작전은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그 동안 닦아놓은 도로에 바퀴가 달린 받침대 위에 배를 싣고 황소와 병사들을 동원해서 배를 끌어올려 운반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운반된 배가 70여척이나 되었고, 성벽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습니다.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골든 혼(Golden Horn)을 장악하게 된 오스만의 군대는 육지 쪽의 성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방어하기에 약하였던 해안성벽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톱하네 카슴파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Golden Horn입구를 가로질러 쳐 놓은 쇠사슬 때문에(Black Line으로 표시) 배들이 혹든 혼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육지로 배를 끌어 이동하였습니다.(하얀 점선 부분)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식량과 물자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비잔틴의 황제는 오스만의 술탄과 협상을 하려 했지만 술탄의 거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주민들도  협상 후 보여줄 술탄의 자비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죽기까지 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의 술탄의 입장도 그리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병력과 막강한 대포와 물자를 들여 포위작전을 시작한지 무려 50 일이나 지났지만,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 안으로 단 한명의 병사도 들여보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의 군대도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둬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로마 기독교군 지원군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술탄 메흐멧 2세는 오스만 군의 총공격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5월 28일 콘스탄티노플은 대포공격으로 인하여 부서진 성벽을 보수하고 최후의 공격을 맞은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 날 저녁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시민은 아야 소피아에 모여 콘스탄티노플을 구원해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도 그의 가족과 부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동안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길 바란다며 비장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 안에는 모인 시민들의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들과 눈물로 가득하였습니다.

게말 아타투르크 터키 초대 대통령이 졸업한 오스만 제국의 사관학교 건물 안에 있는 군사 박물관의 벽화로 그려져 있는, 메흐멧 2세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그린 벽화입니다.

마침내 1453년 5월 29일 새벽 2시경 오스만 제국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교회에서는 요란한 종소리를 내며 공격이 시작됐음을 알렸습니다. 엄청난 대포 공세를 퍼부은 오스만 투르크 군은 마침내 성벽의 케르코포르타의 문을 통해 도시로 진입하여 3중 성탑 꼭대기에 오스만의 깃발을 세웠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와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은 밀려드는 오스만 투르크 군을 막으려고 끝까지 적들과 싸웠습니다. 그때 적들을 대항하여 피를 튀기며 싸우고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오경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은 완전히 오스만 터키 군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도시의 곳곳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약탈과 살육으로 아비규환이 되었고 사방에는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찬란한 도시의 새 주인이 된 술탄 메흐멧 2세는 오후 늦게야 에드리네 카프(아드리아노플 성문)를 통해 당당히 콘스탄티노플에 말을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아야 소피아에 도착한 술탄은 신에게 겸손함을 보여주기 위해 흙 한줌을 쥐어 자신의 터번 위로 쏟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약탈행위를 멈출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사실 약탈 중지 명령이 떨어진 저녁때가 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약탈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술탄 아흐멧 2세는 즉시 아야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 터키의 새 수도로 삼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새 이름인 이스탄불로 바꾸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자비를 베풀어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에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하였습니다.단, 하기아 소피아는 아야 소피야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보존한 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였지만,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며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드 2세와 셀림 2세 때, 건물 주변에 네 개의 미나레트(첨탑)을 세웠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영토를 지배하게 된 후, 수많은 교회(정교회 성당)가 모스크로 전환되면서 그곳에 이슬람 사원의 상징인 미흐랍(Mihrab,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하는 곳)과 민바르(Minbar, 코란을 낭독하는 곳)가 설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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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거의 모든 제단(Apse)은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 방향을 향하여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자세히 보게 되면, 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하여 있는 미흐랍(Mihrab)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앱스 제단(Apse)보다 약간 오른쪽에 위치하여 제단의 오른쪽에 민바르(Minbar)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의 위치에서 볼 때, 예루살렘은 아라비아의 메카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 건물의 제대(Apse)의 방향에 대하여 약간 오른쪽으로 더 틀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액간 더 틀어져 있는 이유가, 원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세워진 제대(Apse)를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이슬람교에서 모든 예배는 메카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하기아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축을 서두르는 바람에 빨리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장식들이 간단한 편으로 마무리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당 내부의 장식들은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간단한 도안들로만 장식되어졌습니다.

이후 수 백 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성모 마리아와 예수, 성인,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의 중앙 양쪽에 있는 기둥은 에베소에 있었던 세계 7 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으로부터 가져온 대리석 기둥입니다.

아야 소피아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기둥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비잔티움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였지만 20 세기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으로 인하여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회칠하고 그려진 이슬람 문양 제거에 이슬람권의 반발도 커서 이젠 회칠 제거 및 모자이크 복원은 80년 넘게 중단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천정에는 군데군데 회를 칠하여 덮었던 흔적과 그것을 벗겨 낸 흔적이 있습니다. 회칠하여 덮었던 부분들 중에는 그 안에 아무것도 없었던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이는 이슬람이 회칠을 하여 덮었던 그 때의 이전에 이미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비잔틴 시대의 말년에는 성전을 밝힐 초를 살 형편이 되지 못하여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리다툼과 재물 축재에 바빴었고, 신자들 가운데에는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 조각을 품에 가지고 있으면 병이 낫는다거나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미신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당 안에는 더 이상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도 오랫동안 없었기 때문에 그때를 틈타서 도둘들이 도둑질과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칼리그라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덟 개의 기둥 위에는 직경 7.5 m짜리 커다란 나무 원판 에 초록색 바탕의 금색 글씨로, 신(알라), 예언자(무하마드), 무하마드의 외손자 두 명의 이름(후세인, 핫산), 그리고 이슬람 초기 4명의 후계자 (아부 바르크, 우마르, 오스만, 알리)의 이름이 1849년에 유명한 서예가인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Mustafa Izzet Efendi)가 쓴 칼리그래프로 쓰여 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형상을 새긴 모자이크는 기대만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지진과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인한 파괴, 제 4차 십자군의 강탈과 오스만 시대에 있었던 파괴 등으로 인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건축할 때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 모자이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전통에 따라 어떠한 형상이라도 만드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표면적인 이유와 함께, 빨리 건물을 완공하고 싶은 황제에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 형상 모자이크는 생략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리석이 아닌 벽과 천장은 전부 모자이크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화려하고 찬란한 모자이크로 채색돼 있었습니다.

우선 금을 입혀 만든 모자이크만 약 1억 5000만개(Mosaic cubes)의 작은 조각이 사용되었으며, 광택이 나는 조각과 광택이 나지 않는 조각, 두 종류의 모자이크 조각을 각도와 방향에 따라 설치하는 획기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모자이크하였습니다.

특별히 돔에 입혀지게 될 모자이크 조각을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최고의 재료와 기술이 필요해서 로도스 섬에서 채취한 매우 가벼운 흙으로 반죽하여 적은 분량으로 높은 접착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하여 애쉬 트리(Ash Tree) 잎사귀를 삶아 즙을 내어 섞어서 만든 접착제를 사용하였습니다.

많은 모자이크들이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m ; 726~843년)때에 형상 모자이크는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은 2층 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의 남아 있는 형상 모자이크는 모두 성상 파괴 운동이 끝난 이후, 즉 843년 이후에 제작된 것들입니다.

무슬림의 형상 금지에도 불구하고 중앙 돔의 가운데 모자이크되어 있었던 권능자 예수 그리스도 (Pantokrator Jesus Christ)와 삼각면 팀파눔의 모자이크는 17세기 말~18세기 초까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당대의 이슬람의 명필이었던 Ibrahim이 쓴 코란의 문구로 대체되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에는 많은 모자이크 작품들의 위에 회칠하여 덮혀 있었던 것들을 제거하여 복원하여 놓았습니다. 여기서는 형상화된 모자이크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들과 일반적으로 놓치기 쉬운 몇 가지를 선택하여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황제 전용 입구의 위에 있는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로 들어가는 문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입구들 중에서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의 위쪽에 있는 모자이크는 입구 위에 반달 모양의 벽면(Lunette)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입니다. 일명 “황제의 문”이라고 불리는 문 위에 있는 성화는 “무릎 꿇은 레오 6세”라고 불리는 성화입니다.

아야 소피아 모자이크, 무릎 꿇은 레오 6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황제의 문 위의 모자이크는 500년 동안 숨겨져 있다가 1933년에 발견되었습니다. 아야 소피아가 박물관이 된 이후,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된 아름다운 모자이크 중의 하나입니다. 이 모자이크는 9세기 말~10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옥좌에 앉으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Ο Χριστός Παντοκράτω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레오 6세 (Λέων ΣΤ΄ ὁ Σοφός)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오른손으로 복을 내려주고 있으며, 왼손에는 성경을 펼쳐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레오 6세(886~912)는 35세가 되기 전에 3명의 부인들을 얻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자 4번째의 부인으로 그의 정부였던 조에와 결혼하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정교회에서는 종교법으로 네 번째 결혼은 금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에는 905년 9월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7세가 될 아들을 낳았고,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콘스탄티누스 7세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는 조건으로 황제의 정부 “조에”가 궁전을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레오 6세는 주교의 이러한 조치를 무시하고 사흘 후에 조에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은밀히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네 번째 결혼”사건으로 인하여 비잔틴 제국은 18개월간 혼란에 싸이게 되는데, 모자이크의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레오 6세의 결혼을 인정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들고 있는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복음 20장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요한복음 8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좌우의 원형 공간에는 각각 성모 마리아와 천사장 가브리엘이 모자이크되어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 모자이크, 무릎 꿇은 레오 6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성을 바치는 황제, 교회를 드리는 황제, 소피아 성당의 남서쪽 입구에 있는 모자이크

우측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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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습니다. 성모와 예수의 좌우에 있는 ΜΡ와 ΘΥ는 Μήτηρ(어머니)와 Θεού(하나님의)의 모노그램으로 “하나님의 어머니(Theotoskos)”,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합니다.

테오토코스(그리스어: Θεοτόκος)라는 기독교 교리에 관련된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즉, 예수는 사람이 된 하나님이라는 그리스도론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人性)과 함께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즉 “신성 출산”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삼위일체 하나님인 성자, 예수를 낳은 “하나님인 예수의 어머니”가 된다는 기독교 교리를 말합니다.

비잔틴 역사에 길이 남을 두 황제(동로마 제국(비잔틴)을 건설한 콘스탄틴 황제와 아야 소피아를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 성전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습으로 형상화 하여 모자이크한 인상적인 모자이크입니다.

 

이 모자이크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자세, 옷 등이 인상적입니다. 무겁게 보이는 옷감을 부드럽게 걸치고 주름지어 광택이 나는 비단 옷은 황제들이 입는 자줏빛이며, 발받침은 은색이 적절히 배치된 모자이크로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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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0세기 후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남쪽 현관 연결 통로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입니다. 혹시라도 급하게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떠나버리면서 이 모자이크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출구 위편으로 커다란 거울을 비치해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디시스 (The Deesis, Deisis)

“Deisis”라는 말은 “기도 또는 간청, 탄원”이라는 뜻인데 이러한 주제는 비잔틴 그림(이콘)의 중요 특징 중 하나이며, 그리스도 예수 좌우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류의 구원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왼손에는 성경을 쥔 채 서있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심판자 그리스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261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모자이크, Deisis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하기아 소피아의 2층 남쪽 갤러리에 있는 Deisis는 비록 상당 부분 모자이크가 뜯겨져 나갔지만 어디에서 보던 시선을 마주치도록 한 비잔틴 기법이 더하여진 예수의 눈은 슬픔과 비애에 젖어 있는 듯이 표현함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보다는 인간애를 느끼게 하는 모자이크입니다.

예수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오른쪽 세례 요한은 고뇌에 찬 슬픔이 온 얼굴 가득합니다. 아래로 수줍게 내려 보고 있는 마리아에게서는 따뜻한 인간 부드러움과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성모 마리아 쪽이 크게 뜯어져 훼손된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좁고 부드러우면서 오똑한 코, 작고 붉은 입술, 갸름한 볼과 턱선, 초승달 눈썹에 크고 맑은 눈은 누가 보아도 성모 마리아를 연상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입니다.

아야 소피아 모자이크, 디시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창문 가까이 빛이 들어오는 쪽에 있는 성모의 모자이크는 무광택으로 처리하여 빛을 등지고 있는 성모의 표정을 다소 어둡고 더욱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 후광의 십자가를 반사 각도를 다르게 하여 모자이크함으로써 중앙의 예수가 더욱 빛나도록 하는 등 모자이크 기법의 탁월성이 돋보이는 모자이크입니다.

13세기 중엽~14세기 초기 작품으로 1261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비잔틴을 수복한 후 문예부흥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 이전 즉 12세기 중엽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세 사람의 황제와 결혼한 조에 황후

작품으로서의 모자이크라기보다는 흥미 있는 역사적 인물 탐구용 모자이크가 남쪽 갤러리 마지막 베이(교각 사이, 칸막이 사이)에 있습니다. 11세기 중반~12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써 황제와 황후가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권능자)에게 상징적인 선물을 드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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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의 명문대로 보자면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로마의 절대 왕 콘스탄티누스 9세“가 은주머니를 들고 있고, 그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이한 “가장 경건한 황후 조에 오구스타”는 두루마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모자이크에서 재미있는 것은 왕의 얼굴 모자이크가 결혼할 때 마다 계속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누스(Romanus) 3세(1028~34년), 미카엘(Michael) 4세(1034~41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9세(1042~55년)로 얼굴이 계속 바뀌어져 왔던 것입니다.

모자이크에 의하면 20 대의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에 여제가 세 번째 남편과 결혼했을 때는 실제 나이가 64세였는데, 자신에 비해서 나이가 상당히 어린 왕을 남편으로 맞이하였던 조에 여제는 건강과 피부 관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모자이크입니다.

조에 황후는 황제로서의 첫 남편(로마누스 3세)과 쉰 살에 결혼했고, 두 번째 남편인 미카엘과 결혼 할 때에는 59세였으며, 세 번째 남편(콘스탄티누스 9세)과 혼인했을 때는 64세였습니다. 그녀는 새로이 남편을 맞이할 때마다 모자이크에 그려진 남편(황제)의 모습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자이크도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수정하였습니다.

새로운 황제의 얼굴을 새롭게 모자이크할 때마다 모자이크 위의 문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얼굴도 두 사람과의 조화를 위해 고쳤습니다. 모자이크를 자세히 보면 예수의 얼굴 부분이 리메이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이 여제(Ζωή, 재위기간 : 1028년. 11월~1050년. 6월)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있는 IC와 XC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입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들고 있는 돈 자루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요한 2세 콤네누스 황제와 황후 이레네.

요한 2세(1118~43년)가 대관식을 하던 해에 제작된 모자이크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가운데에 서 있으며 진한 파란색 성의에 정숙하고 침착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 모자이크, 콤네누스와 이레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매우 어리게 표현되었으며, 성모 마리아의 얼굴 중 최고 수준의 아이콘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황제 복장에 진주 보석 등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황금 주머니를 들고 있는 황제는 “하나님의 충실한 왕, 황손으로 태어난 로마 제국의 권력자 콤네누스”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붉은 머리의 “신실한 황후, 이레네”는 두루마리 문서를 쥐고 있습니다.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와 이레네 황후(Ειρήνη, 1088~1134.8.13), 그리고 측면에 모자이크 되어 있는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Ἀλέξιος Κομνηνός)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 마리아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22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후진(apse, 제단 뒤에 움푹 파인 곳) 모자이크

후진의 반원의 돔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나님의 어머니) 모자이크라고도 하며, 6 세기에 제작되었다가 8 세기의 성상 파괴 때 훼손되었던 것을 9 세기경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자이크입니다.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형상인데 대좌와 옥좌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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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 성당의 2층은 황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된 곳입니다. 2층의 정 가운데 앞쪽으로 황후가 앉는 자리가 대리석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 , 황후가 예배드리는 곳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왼쪽 약간 낮은 기둥 두 개의 사이가 황후의 자리

대리석을 깍아서 만든 문을 지나면 후진(Apse) 위의 반원으로된 돔에 모자이크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는 곳이 예배드리는 여인들을 위하여 마련하였습니다.  여인들은 그곳의 대리석 벽에 손을 대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 황후가 예배드리는 곳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아야 소피아 , 황후가 예배드리는 곳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인들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이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 옴팔리온(Omphalion, 배꼽)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낭독하던 민바르(Minbar) 앞의 바닥에는 녹색, 붉은색 대리석 석판들로 장식된 “오푸스 알렉산드리움(Opus Alexandrium)” 이라고 불리는 원형 무늬로 모자이크 되어 있습니다.

내부 바닥에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옴팔리온(Omphalion)이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원형 대리석들이 바닥에 끼워져 있는 형태이며, 비잔티움 제국의 역대 황제가 이 자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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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팔리온(배꼽) 황제가 대관식을 거행하였던 곳

비잔틴 황제의 발이 닿는 바닥의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원 위에서 비잔틴 황제들의 대관식이 이루어졌는데 이곳을 “세계의 배꼽”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비잔틴 황제가 하나님을 대리해서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커다란 원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있는 12개의 작은 원들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을 상징합니다.

* 베르가몬(Perge) 대리석 항아리

본당 입구 양쪽에 두 개의 커다란 대리석 항아리가 놓여 있습니다. 고대 도시 페르가몬에서 발견된 것을 술탄 무라드 3세가 이곳으로 가져와 설치하여 예배의식 전에 세정할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했던 대리석 항아리입니다.

아야 소피아 , 항아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전설에 의하면 한 농부가 페르가몬 왕국의 아크로폴리스 근처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똑같이 생긴 대리석 항아리 3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농부는 이 사실을 지방관리에게 알렸고 관리는 왕에게 소식을 보고하여 왕은 두 개의 항아리를 이스탄불로 가져오게 했고 나머지 하나는 농부가 갖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농부는 선물 받은 항아리를 가져갔는데 그 속에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왕이 항아리에 대한 보답으로 넣은 것입니다.

항아리 안에 든 금화를 발견한 농부는 숨기지 않고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는데 왕은 농부의 정직함을 기특히 여겨서 금화뿐만 아니라 그 항아리가 발견된 지역을 농부의 농토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 아랍어 캘리그라피

성 소피아 내부에 보면 아랍어로 쓴 캘리그라피의 거대한 둥근 원판이 8개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알라, 선지자 마호메트, 4대 정통 칼리프인 아브바크르, 외메르, 오스만, 알리와 그의 아들 하산, 후세인의 핫(Hat)입니다. 핫(Hat)이란 아랍식 서체를 말하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인물을 형상화 할 수 없기 때문에 서체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아야 소피아 , 캘리그라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세라핌

본당(Nave)의 중앙 돔(dome)을 지지하고 있는 펜던티브(pendentive)에 4 개의 크고 긴 기둥 사이에 있는 역삼각형에 모자이크 되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세라핌(Seraphim)입니다.

아야 소피아, Seraphi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천사 중에서 제일 품계가 높은 천사로서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날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일을 하는 천사인데 성경에서는 (이사야서 6:2~7)에 “스랍”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천사들의 얼굴은 각각 사자, 황소, 독수리 그리고 천사장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람의 얼굴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오스만 터키가 아야 소피아를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할 때, 지워버리고 다각형의 별모양으로 덮어 버렸던 것이었는데 벗겨내어 제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Seraphi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다면 동쪽 편에 있는 두 개는 비잔틴 때 모자이크된 것이지만 서쪽 편에 있는 세라핌은 후대에 복사하여 그려 넣은 모자이크입니다. 1847년부터 1849년에 포사티 형제가 보수 작업을 하면서 세라핌의 얼굴에 별 모양의 노란 마스크를 씌워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라핌을 자세히 관찰하면 날개의 색깔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진으로 파손된 부분을 복구 보완했기 때문입니다.

* 땀 흘리는 기둥(weeping column)

아야 소피아 본당의 북쪽에 기둥이 하나 있는데 청동으로 둘러싸여 있고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기둥은 “땀 흘리는 기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둥 밑으로 지하수가 흐르기 때문에 습기가 차서 땀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늘 기둥이 젖어 있었는데 이곳에 작은 구멍들을 내어 물을 빨아들여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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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사원 안을 거닐다가 두통이 심해 기둥을 잡고 머리를 기대었는데 그 기둥이 바로 이 기둥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놀랍게도 기둥에 머리를 대자 두통이 사라졌는데 그 이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이 기둥에 와서 만지기 시작했고 정말로 많은 병이 나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의 기둥”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 기둥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기둥이 파손되는 바람에 지금은 아예 청동으로 기둥을 둘러싸버리고 그곳에 구멍 하나만 남겨 놓았는데 이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돌리면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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