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세빌랴(Sevilla)

세빌랴(Sevilla)

각 나라별로 그 나라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도시를 하나만 말해야 한다면, 어느 도시입니까? 이탈리아라고 한다면 당연히 로마일 것이고, 프랑스라고 한다면 파리이며, 그리고 한국이라고 한다면 Seoul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페인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느 도시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수도인 마드리드, 축구로 잘 알려져 있는 바르셀로나, 톨레도(Toledo)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대다수가 바로 세빌랴(Sevilla, Seville)라고 주저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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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그린, 세빌랴

세빌랴(Sevilla)는 스페인의 남쪽에 있는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에 있는 도시로서 약 700,000명이 살고 있는 스페인에서는 4번째로 커다란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오페라 “카르멘”으로 유명한 도시이며, “투우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빌랴는 겨울에도 45~50⁰F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일 년 내내 이러한 온화한 날씨 때문에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빌랴는 해양 민족이었던 “페니키아(Phoenician)” 사람들이 약 2,200년 전부터 이곳에 정착하였다가 로마 제국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로마 시대의 도시로 발전하였던 곳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이곳이 “Hispalis”라고 불렸다가, AD 712년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이었던 무어 족(Moors)에 의해서 정복당한 이후로는 “Ishbiliya(Arabic: إشبيلية‎‎)”라고 불렸던 도시입니다.

그 후 1492년에 Ferdinando 3세가 이슬람교도들의 도시를 정복하여 “Kingdom of Castile”이라는 기독교 왕국, 즉 기독교 도시국가가 세빌랴(Sevilla)에 재건되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남서부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 하구에 위치한 세빌랴(Sevilla)는 1248년 이 전인 이슬람의 아랍 왕조 시대에도 이곳은 아랍 왕조의 수도였지만, 1248년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3세와 까스띨랴의 이사벨 여왕이 연합하여 아랍 세력을 몰아내면서 본격적으로 스페인의 주요 도시로 자리를 잡았던 도시였습니다.

세비야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개척하면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아즈텍 문명과 남아메리카의 마야와 잉카 제국의 황금과 은이 과달키비르 강을 통하여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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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illa를 가로지르면서 흐르고 있는 Guadalquivir 강의 모습

이사벨 여왕의 환송을 받으며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국에서 후원하여 주는 범선을 타고 떠났다가 아메리카 대륙(실제로는 지금 도미니카 공화국과 하이티가 있는 서인도 제도의 히스파뇰라 섬)을 발견하고 돌아온 곳도 바로 이곳, 과달키비르 강이었으며, 막대한 부를 챙길 수 있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배들이 바로 이곳 세비야의 과달키비르 강 하구에서부터 그들의 돛을 올리면서 떠났고, 돌아올 때도 이곳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 세빌랴는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개척의 전초기지이면서 아메리카 교역의 중심 도시인 셈이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아랍 세력을 몰아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과 까스띨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은 유럽의 다른 나라, 특히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북부 이탈리아 같은 곳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베리아 반도(스페인)를 경제적으로 부흥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그 유일한 방법이 인도로 가는 해상 길을 개척하여 무역을 확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 탐험과 같은 길을 개척하는데 자본금을 대어 줄 수 있는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들을 찾아 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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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탑 (한 쪽에는 페르난도 왕의 이름, 다른 쪽에는 이사벨 여왕의 이름이 새겨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 국왕과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항해를 돕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일에 후원을 한다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얕은 물에서 땅 짚고 헤엄치는 것과 같이 손쉬운 일이었습니다. 탐험에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여 줌으로써 그 결과로 인하여 얻게 되는 많은 이익을 스페인 황실은 손쉽게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여 향신료 따위를 쉽게 들려오는 일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신대륙의 식민지화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신대륙의 식민지 정책을 통하여 까스뗄랴와 레온(스페인) 왕국이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내부의 경제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 급격하게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황금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메리카 신대륙을 스페인의 식민지로 삼으로면서 그곳으로부터 유입되는 금과 은, 그리고 보석들을 수도 없이 거두어들이게 된 결과였습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아즈텍이나 마야, 잉카 문명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약탈당하면서 모든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족이 몰살당하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였습니다.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제물로 하여 얻어진 착취와 약탈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왔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통계가 있습니다. 1500년~1650년에 유입된 금은 모두 181,000 Kg이었고, 은은 16,000,000 Kg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금을 많이 들여왔지만 16세기 중반부터는 은을 대량 유입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대륙으로부터 들어 왔던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그들은 중국과 인도로부터 영입되는 호사품인 Silk, China, 그리고 향신료 등을 수입하여 최고의 향락을 누렸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스페인에는 금과 은이 넘쳐나 그 부유함을 주체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건에 비하여 돈이 너무 많게 됨으로써 Inflation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 전의 물가에 비하여 3~4배가량 오르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으로 인하여 인근에 있던 나라의 제조업자들과 상인들이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오는 신대륙의 땅을 황금의 땅, 엘도라도(el Dorado, 황금빛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바로 과달키비르 강의 하류에 위치하였던 세빌랴가 그곳, “엘 도라도(El Dorado)”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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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세빌랴 지도

이렇게 하여 세빌랴(Sevilla)는 새로 개척한 식민지와 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부상함으로서 유럽에서 가장 활기차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나 제노바가 주도하였던 지중해의 시대가 지나가고 드디어 스페인의 세빌랴(Sevilla)가 주도하는 대서양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세빌랴(Sevilla)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소설과 오페라가 등장하였던 것은, 유럽의 부유한 도시로서 이제 새롭게 급부상하였던 세빌랴(Sevilla)의 경제적 번영과 관계가 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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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까르멘의 무대가 되었던 로얄 담배 공장 건물(the Royal Tobacco Factory of Seville)

오페라 “카르멘”에 무대 배경이 되어 등장하는 담배 공장을 보게 되면, 일반적으로 공장이라고 생상하면서 허름한 작업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마치 왕궁과 같이 생긴 매우 화려한 건물이었습니다. 지금은 세빌랴 대학의 캠퍼스로 사용되고 있는 그 건물의 겉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을 정도입니다.

“무슨 담배 공장이 이렇게 화려했을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으나, 다시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대륙으로부터 새롭게 유입된 기호품인 담배를 가공하여 파는 이 사업은 누구도 손을댈 수 없는 완전한 독점 판매였으며, 담배는 그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독점 상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황금 알을 낳는 상품을 취급하는 공장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메리카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되어 온 금과 은이 스페인 전 지역에 넘치다 보니 사람들이 땀을 흘려 일을 할 생각을 하기 보다는 모두들 신대륙으로 가서 일확천금을 얻을 생각만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Spanish Gold Rush”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 번만 잘 하면 일생이 부유하게 보장되는데, 누가 힘들여 옷감을 짜고 물건을 만들면서 힘들게 일을 하겠습니까? 현재 스페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즐길 것은 모두 다 즐기면서 느긋하게 사는 풍조가 아마도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2010년 유럽에서 일어났었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국가 신용도가 하락하여 위기를 맞았던 사실들은 이러한 근성과 무관하지 않게 보입니다. 좋게 보면 여유가 있어서 좋아 보인다고 하지만 그 만큼 힘든 일을 회피하면서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 근성을 말합니다.

그 당시의 다른 여러 나라들의 예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보다는 오히려 공상품생산에 집중했던 영국이 금과 은을 가져왔던 스페인보다 사실 더 많은 부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직이나 면직 공업을 중심으로 하여 공산품 생산이 발달하였던 영국에서는 생활 필수품들을 구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 비하여 돈은 매우 흔하였지만 세빌랴에서는 좋은 상품들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영국에서 생산된 공산품들을  스페인으로 가져다가 매우 비싼 값에 팔게 되면 3 ~ 4배나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으니, 이런 호황이 또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스페인으로 들어온 신대륙의 금과 은은 영국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영국의 경제를 한층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재주는 스페인이 부리고, 돈은 영국이 챙긴 셈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이 이렇게 수공업 생산에 취약하게 된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이슬람교도로부터 국토를 회복하고 난 후에, 기독교(가톨릭)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즉 Moors 사람들과 Jews(유대인)를 스페인 국토에서 완전히 추방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자본가였던 유대인(Jews)들과 숙련공들이었던 무어인(Moors)들을 추방함으로써 국가의 인력 자본과 산업의 원동력인 기술을 유기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상업적, 수공업적인 기반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식민지로부터 손쉽게 빼앗아 온 재물, 즉 쉽게 얻은 재물을 사치와 향락으로 쉽게 써버리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인하여,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탄탄한 경제와 산업 구조를 이룩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sevilla cathedral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세빌랴 대성당

이렇게 세빌랴(Sevilla)가 이슬람 교도들의 지배로부터 기독교의 힘이 강하여 짐으로 기독교 국가이면서, 또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부유한 도시로 부각되면서 여기에 걸 맞는 대규모의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한 후에 사람들은, “이 건물이 너무나 커서 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라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만큼, 크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성당)을 이곳에 짓도록 하자.”라고 말하면서 “세빌랴 대성당”을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세비야 투우장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가에 있는 세빌랴의 투우 경기장

세빌랴(Sevilla)는 스페인 남부 지방인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아랍문화와 스페인 문화가 뒤섞여 있는 “열정”이 쉴 틈도 없이 꿈틀대는 곳입니다. 이곳은 성난 황소와 빨간 망토가 춤을 추는 투우경기와 마치 투우장으로 돌진하는 황소와 열정적으로 싸우는 투우사와 함께어울려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정열적인 춤, 플라멩코(Flamenco)춤이 유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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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적인 춤, 플라멩코(Flamenco)춤

한 편 세빌랴(Sevilla)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오페라”입니다. 유명한 비제의“카르멘”이나 롯시니의“세빌랴의 이발사” 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서 세빌랴(Sevilla)라는 이름은 우리들에게 익숙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있는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의 하류에 있는 세빌랴(Sevilla)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곳으로부터 들여온 막대한 금과 은, 그리고 식량을 들여오는 관문으로써 16세기~17세기 대항해 시대에 막대한 부의 중심이 되었던 도시였습니다.

번역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세빌랴가 낳은 스페인의 사랑받는 시인, 안토니오마르차도(Antonio. Marchado)의 시 한편을 생뚱맞기는 하지만 쉬어 가자는 뜻으로 소개합니다.

Caminante (Antonio Marchado)     길을 걸어가는 사람 (시인, 안토니오 마르차도)

Caminante,                                        길을 가는 사람이여,
son tus huellas                                  길은 당신의 발자국들 뿐
el camino, y nada mas;                    그리고 아무 것도 없어요;

caminante,                                         길을 가는 사람이여,
no hay camino,                                  길은 없어요,
se hace camino al andar.                  당신이 걸어가면서 만든 길 밖에는.
Al andar se hace camino,                 걸어가면서 길을 만들고,
y al volver la vista atras                    돌아서서 뒤를 돌아보니
se ve la senda que nunca                당신이 한 번도 밟지 않았던
se ha de pisar.                                   길이 보이네요.

Caminante,                                        길을 가는 사람이여,
no hay camino,                                 길은 없어요.
sino este las en la mar.                    바다에는 별들만 있을 뿐이지요.

이렇게 세빌랴(Sevilla)는 대항해시대에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엄청난 부유(富裕)함이 넘쳐났었던 도시였습니다. 당시의 영화로웠던 부유함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많이 남아 있는 도시가 바로 세빌랴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유적이 “세빌랴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la Sede)”입니다.

세빌랴 성당의 히랄다 탑

하은교회 3차 성지 순례 팀, 단체 사진

원래 그 자리에 12세기(AD 1100대 후반)에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 시절 이슬람 사원으로 건축된 건물이 있었는데, 이 사원을 허물어 내거나 개축 또는 증축하여 16세기 초에 세빌랴 대성당으로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4각형의 첨탑인 히랄다 탑(La Giralda)은 너무 아름다워 부수지 않고 그 대신 그 위에 예배 시간을 알리는 28개의 종을 달아놓았고, 탑의 꼭대기에 기독교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이 청동으로 만든 풍향계(La Giralda)의 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세워놓고, 1565년부터 1568년까지 공사하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빌랴 대성당 (Cathedral of Saint Mary)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이 “세빌랴 대성당(Seville Cathedral)”이 서 있는 곳은 원래 12세기에 건축되어진 이슬람의 모스크였습니다. 전체적으로 고딕 양식에 의해서 건축되어진 “세빌랴 대성당”은 1401년부터 증축과 재건축이 시작되어 100년이 넘게 공사를 진행하여 1506년에 완성되어진 거대하고 아름다운 가톨릭 성당 건축물입니다.

성당 건물이 완성된 지 5년이 된 1511년에 중앙의 돔(Dome)이 무너져 내려졌다가 다시 보수되었지만, 1888년에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무너졌으며, 그 보수공사는 190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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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랴 대성당의 정문과 그 앞에 있는 히랄다의 모형

히랄다(Giralda)라는 이름을 얻게 된 4m 높이의 여성상이 들고 있는 풍향계를 똑같이 하나 더 만들어 세빌랴 대성당의 입구에도 하나 세워 놓았는데, 풍향계의 풍향 판을 들고 있는 한 여성이 공위에 위태롭게 올라가 서 있는 형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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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북쪽 문과 오렌지정원

이 건축물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건축되어진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고딕 양식, 신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그리고 이슬람 건축 양식, 등 여러 가지의 건축 양식들이 섞여서 건축되었으며, 건물의 각종 장식들이나 문양들에는 아직도 이슬람의 문양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유럽의 다른 가톨릭 성당들은 대부분 십자가의 형태로 건축되어졌으나, 이 세빌랴 대성당은 전통적인 이슬람 사원과 유사한 형태와 기독교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대부분은 Limestone을 다듬어 만든 큰 벽돌들을 이용하여 쌓아서 건축되어진 건물입니다.

세빌랴 대성당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쪽의 출입문은 수많은 성상으로 웅장하게 장식된 고딕식으로 건축하였고, 대성당의 정문 위쪽에 나 있는 창문을 성당의 안에서 보게 되면 화려한 빛이 들어오도록 Stained Glasses를 이용하여 창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세빌랴 대성당을 관람하기 위해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남쪽의 문”입니다. 이 “남쪽 문” 앞에는 청동 조각상이 서 있는데, 그 문 위에는 끝이 뾰족한 여러 가지 모양의 첨탑들과 다양한 성상들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놓은 고딕 약식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가는 문은 북쪽 정원으로 통하여 나있는 “북쪽 문”입니다. 대성당의 북쪽 문에는 별다른 장식으로 단장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의 종탑들이 있으며, 이 북쪽 문을 나서게 되면 곧 바로 약 60 그루 정도의 오렌지 나무들이 심겨져 있는 정원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곳은 원래 이슬람 사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었던 우물이 있었던 정원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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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발을 씻은 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바닥에 문양으로 만들어 놓은 물고랑이 보입니다.

그리고 문의 위쪽에는 마치 성채의 망루와 같은 느낌이 드는 모습으로 만든 성당 출입구와 마치 열쇠 구멍처럼 생긴 문을 지나게 되면 상업 지구와 주택가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식으로 건물을 다시 건축하였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성당의 구조와 부분적인 장식 등은 어쩔 수 없이 이슬람 스타일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슬람 문양도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이슬람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 건축물입니다.

세빌랴의 대성당에는 신대륙을 발견하였던 콜럼버스(Cristóbal Colón)와 세빌랴를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되찾은 영웅, 산 페르난도 왕을 비롯하여 스페인 중세기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중세시대에 안달루시아 성을 통치하였던 왕들의 유해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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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버스의 무덤

세빌랴(Sevilla)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óbal Colón)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는 항해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항해에 필요한 후원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꿈은 계속해서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당시 España의 왕이었던 “이사벨라 여왕”이 콜럼버스의 꿈을 실현시켜주려는 후원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콜럼버스는 Sevilla를 그의 근거지로 하여 1492년부터 1503년까지 4번의 도전 끝에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 해양탐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지금의 카리비안(West Indies Islands)의 여러 섬들 중에서 첫 번째로 발견하게 된 섬, Hispañola Island(지금의 하이티와 도미니칸 공화국이 있는 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그곳에서 얻게 된 막대한 양의 금, 은 그리고 담배, 카카오, 설탕 등이 스페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스페인은 세계 최대의 부국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의 세빌랴(Sevilla)는 신대륙의 출항을 시작하는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과 무역에 독점권을 가진 유일한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제 2의 로마라는 별칭에 걸맞게 세빌랴(Sevilla)는 신대륙으로 가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기 위해 몰려들었던 유럽의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세비야 대성당의 화려함은 그 당시 얼마나 이 도시가 번성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세빌랴(Sevilla)의 사람들은 원래 거대한 이슬람 사원이었던 이 건축물을 성당으로 개조하기 위해 오랜 기간의 공사 기간을 통하여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축하면서 1519년에 완공하였는데,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건축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후에 세워진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입니다.

이 세비야 대성당은 콜럼버스의 유해가 있어서 더욱 유명한데, 그 모습 또한 특이합니다. 그의 관은 스페인의 왕들의 모습하고 있는 큰 조형물들의 어깨에 놓여있습니다. 스페인 사람도 아니면서 뱃사람이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유해를 스페인의 왕들이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으로 유해를 안치시킨 이유가 무척 궁금합니다.

세비아 대성당은 특별히 이 도시의 수호신인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Santa Maria Catedral”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당의 왕실 예배당에는 황금을 입혀서 정교하게 다듬어 조각한 성모상이 서 있는데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회의실에는 이곳 세빌랴(Sevilla) 출신의 유명한 화가 무리요(Murillo)가 그린 “성모수태”가 있고, 산 안토니오 예배당에는 무리요(Murillo)의 “산 안토니오의 환상”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이 성당 안에 있는 성물과 내부 장식들은 대부분 금을 입혀서 만들었거나 금으로 만들어져서 화려하기가 이를 데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청동문과 청동으로 만든 창살들은 원래 모두 은으로 만들었는데 적에게 빼앗길까봐 은을 감추기 위해 겉에는 청동을 입혔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지배자들의 약탈물들로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던 것입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그가 평생 동안 원하였던 항해에 성공하였지만 정작 그는 금, 은, 보화도 가져오지 못하고 항해를 마치고 나서 관절염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스페인 왕실은 이렇게 막대한 부귀영화를 가져다 준 그를 차갑게 외면하고 말았는데 마침내 그는 홀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게된 콜럼버스는 죽어서도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면서 그가 처음으로 발견했던 Hispaniola 섬(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36년 후 Hispaniola 섬의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성당에 안장되면서 실현되는 것 같아 보였지만, 1795년 프랑스가 Hispaniola 섬을 정복하였을 때 그의 유해를 쿠바로 옮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89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을 때,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그가 대서양 탐험의 꿈을 이루기 시작하였던 도시인 세빌랴(Sevilla)의 “세빌랴 대성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세빌랴의 후세 사람들은 이 도시를 번영의 도시로 바꾸어 준 콜럼버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었던지 그의 유언대로 그의 유해가 스페인 땅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콜럼버스의 유해가 담겨 있는 그의 관을 스페인의 각 Providence들을 상징하는 왕들의 조각품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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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랴 대성당의 내부

세빌랴 대성당은 15세기에 건축되어진 건축물로써, 이슬람 건축 양식과 중세 시대의 기독교 건축 양식인 고딕식 건축 양식을 조화롭게 어울려진 가운데 건축한 건축물에 돔(Dome)을 얹어서 건축한 르네상스식의 건축 양식의 가톨릭 성당 건축물입니다.

세빌랴 대성당의 내부는 스페인이 신대륙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부를 얻어 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축되었습니다.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인 돔을 얹어서 건축하였기 때문에 기둥이 조금 많기는 하지만 비교적 넓은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당의 동쪽 편에는 제단이 있고, 서쪽 편에는 정문이 있으며, 정문의 위쪽에는 십자가를 장식하였고 그 위에는 Stained Glass로 장식된 창문이 있도록 디자인하였습니다. 궁전이 있었던 알카사르(Alcasar)로 가는 문이었던 남쪽문은 왕과 귀족들이 출입하였던 문이었고, 일반 서민들은 북쪽의 문으로 출입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귀족들이 출입하였던 남쪽의 문 부근에는 콜럼버스의 유해가 있는 곳에 있는데, 옛 스페인의 대표적인 왕국이었던 Leon, Castilla, Navarra, 그리고 Aragon을 상징하는 왕들의 조각상들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하여 놓은 콜럼버스의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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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제단 뒤편에 조각되어 있는 성서 인물들의 조각품들 대성당의 내부

성당의 동쪽 편에 놓여 있는 제단에는 아름다운 각종의 금속세공품들로 장식하여 놓았으며, 제단의 뒤편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성서에서 나오고 있는 인물들을 조각하여 놓은 조각품들이 제단 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내부 벽을 도금하여 장식하기 위하여 1,500 Kg의 순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에 놓여 있는 파이프 오르간은 약 7,000개의 파이프를 사용하여 만든 대형 파이프 오르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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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는 스테인드그라스 창문

성당의 서쪽에 있는 정문 위에는 아름다운 Stained glass로 장식된 창문을 통하여 빛이 들어오고 있으며, 벽돌을 쌓아서 만든 돔(Dome) 형식의 지붕을 성당의 천정으로 만들었습니다. 돔 형식의 지붕을 옆으로 따라가면서 그 밑으로는 작은 창문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마도 벽돌들로 쌓아 만든 지붕의 하중 때문에 창문들을 크게 만들지 못하고 작게 만든 것 같습니다.

스페인을 비롯하여 많은 중세 국가에서 건축하였던 성당의 건물에는 그 중앙에 왕과 왕족들, 그리고 귀족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별도의 제단이 있는 곳입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예배 공간의 중앙에는 왕이 앉았던 곳이 놓여있고 그 옆으로는 예배(미사)에 참석하는 왕족이나 귀족들을 위하여 마련된 자리가 있습니다.

왕실 예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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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illo의 작품인 “산 안토니오의 환상”

이곳 왕실 예배당에는 세빌랴의 유명한 화가 무릴요(Murillo)의 작품인 “산 안토니오의 환상” 과 고야(Goya)의 작품들과 주르바란(Zurbarán) 등과 같은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걸려 있습니다.

히랄다 탑 (Torres de la Giralda)

이 세빌랴 대성당의 원래 건물은 이슬람 사원이었는데 12세기 당시에 세빌랴를 다스렸던 알모하드 왕조의 이슬람의 종교지도자(خليفة, khalīfa)의 명령에 의해서 12세기에 이슬람 사원(Mosque)의 미나레트(Minaret,이슬람 첨탑)로 지어졌던 것을 세빌랴 대성당으로 개조한 후인 1568년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종루와 더불어 탑 꼭대기에 풍향계(giralda, el giradillo)를 들고 있는 여인의 청동상을 얹어 놓음으로써 이 탑의 이름을 “히랄다 탑(Giralda Tower)”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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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히랄다 탑은 로마 시대에 사용되었던 돌 벽돌들을 재활용하여 쌓아 올린 건축물이며, 전형적인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외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탑의 높이는 97 m이었는데 이후에 모두 28개의 종을 매달았던 종루와 청동 풍향계를 들고 있는 여인의 동상이 첨가 되면서 그 높이가 105 m로 되었으며, 이 탑은 종교적인 탑이었을 뿐만 아니라 망루로 사용되었던 것을 반증이나 하듯이 통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는 각 층마다 작은 창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창문들을 통하여 사방을 관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문들에는 번호가 붙여져 있는데 2 번으로부터 시작하여 33 번까지였습니다.

이 탑에는 특이하게도 계단이 없습니다. 다만 경사진 오르막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건설한 이유는 Muezzin(이슬람교에서 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외쳐 알리는 사람)이 하루에 다섯 번씩 말을 타고 이 탑의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배려였다고 하는데 사실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아무튼 히랄다 탑의 꼭대기에 올라서게 되면 세빌랴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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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랄다 탑에서 보이는 세빌랴 대성당 지붕의 모습,

히랄다 탑을 장식하고 있는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너무도 정교해서 돌로 건축했으리라고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대성당과 세빌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독특한 양식의 아름다운 집들이 눈 아래 펼쳐지는 모습은 장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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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랴의 부유한 유대인들의 거주지였으며 유서 깊은 싼타크루즈 거리

알카사르(Alcázares de Sevilla)

중세 시대에 세워진 스페인 대부분의 도시들은 대성당과 왕들이 거처하였던 왕궁인 알카사르(Alcázar)와 귀족이 살고 있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세빌랴를 다스리던 왕들이 거주하였던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궁인 알카사르(Alcázar)는 대성당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기원은 옛날 이곳을 통치하였던 코르도바의 아랍 칼리파가 913년에 알카사르(Alcázar)를 이곳에 건설하면서부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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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까사르로 들어가기 위하여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대성당의 남쪽 광장의 맞은편에 알카사르 요새의 성벽과 성곽 그리고 성문을 볼 수 있는데, 아랍 특유의 양식으로 건설된 것들입니다. 알카사르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문을 들어서게 되면 옛날 왕궁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넓은 뜰이 나옵니다.

알카사르의 안 뜰 가운데 문은 돈 뻬드로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무역관리소(House of trade) 그리고 마당의 동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1340년대에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알폰소11세 때에 건축되었다고 하는 궁궐이 있고 그 정면에는 알카사르의 중심이 되었던 건물이 있는데, 그곳은 이슬람의 칼리프가 거주하였던 곳이며, 나중에는 스페인의 국왕들이 머물렀던 궁전입니다.

이 안뜰의 서쪽에는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와 무역을 관리하기위해 건축하였던 건물들(House of Trade)의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의 1층에는 공청회장이 있고, 2층에는 박물관의 형태로 꾸며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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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뜰의 문을 지나 궁전 안으로 들어오면 보이는 모습입니다.

Don Pedro Palace (돈 뻬드로 궁전 또는무데하르 궁전)

유럽 전역에는 가톨릭 세력이 국가를 다스리던 중세 시대에 있었을 당시에 스페인 땅을 통치하고 있었던 코르도바의 이슬람 칼리파가 세빌랴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요새로 건설하였던 알카사르(Alcazar)는, 스페인의 기독교도가 다시 이곳을 점령한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새롭게 건축된 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도시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요새이면서도 이슬람 칼리파가 궁전으로 사용하였던 알카사르에서는 계속해서 스페인의 국왕이 거처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왕의 숙소와 거실이 있었던 “돈 뻬드로 궁전”은 이슬람 군주가 사용하였던 그 건물과 시설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용되었거나 또는 증축을 하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번성하였던 대항해시대에 식민지 무역 사업을 관리하는 기관의 건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세빌랴의 알카사르 성채의 성문에 들어서게 되면, 14세기에 이슬람 군주가 건물을 건축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푸른색 세라믹타일과 회반죽과 나무로 지어진 돈 뻬드로 궁전(무데하르 건축 방식으로 장식된 궁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건물의 출입구에는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넓지 않은 출입문을 통과하여 넓지 않은 통로를 따라가면 왕의 처소와 왕을 알현할 수 있었던 알현실과 왕족들이 생활하였던 처소 등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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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접견실로 들어가게 되면 아람브라 궁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중정형식의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정원은 스페인의 군주들이 대리석으로 덮어 놓았던 것인데, 2004년에 이곳이 발굴되어 다시 원래 정원의 모습들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아랍 궁전의 특징은 주거 형태의 건물들 가운데에 정원을 만들어 두고 있는 중정형식의 건물들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알카사르 궁전의 모습이 이슬람 전형적인 궁전의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러한 중정형식의 건물들은 대개 그 입구가 비교적 작으며, 좁은 통로를 통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만든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궁전 출입구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외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었던 알현실이나 접견실이 있는 영역인 “인형(처녀들)의 파티오(정원)Patio de las Doncellas”라고 불리는 곳으로 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그라나다의 “아람브라 궁전”과도 같은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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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처녀들)의 파티오(Patio de las Donchellas)”

기독교 국가의 왕이 거처하였던 궁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건물의 구조로 만들어진 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특색들 가운데에는 이슬람 고유의 정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인형의 파티오”라고 불리는 정원이 있습니다. “인형의 파티오”라고 불리는 공간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호텔의 “Lobby(로비)”와 같은 공간인데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왕과 왕의 가족들의 처소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처녀들(인형)의 파티오”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은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던 무어인(Moors) 이슬람교의 칼리파가 이베리아 반도의 성(省)에 있는 기독교 도시 국가(Providence)로부터 매 해 100명의 처녀들을 조공으로 받아서 왕실의 후궁으로 받아들였다는 역사적인 일에 의한 것입니다.

이 정원은 이탈리아의 황실 건축가였던 Luis de Vega가 르네상스 이탈리안 스타일로 디자인하여 주로 대리석을 사용하여 기둥과 바닥을 장식하였고 이슬람의 무데하르 식의 말발굽 형으로 된 아치보다도 반원형의 아치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회랑의 복도들은 역시 대리석으로 깔았으며, 리셉션 홀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었으며, 나무로 섬세하게 조각을 하여 대문과 천정 등을 장식하였고 다양한 색조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타일로 벽과 바닥을 장식하여 그라나다에 있는 아람브라의 궁전을 연상하게 하는 구도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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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알현실로 알려져 있는 “대사의 방”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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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의 방의 돔 천장에 장식되어 있는 무늬

그리고 그 안쪽에 “대사의 방(Salon de Embajadores)”이라고 불리는 왕의 접견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국가 공식행사와 이벤트를 열었던 곳으로써, 1526년에 까를로스 5세와 포르투갈의 공주 이사벨라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돈 뻬드로 궁전의 “대사의 방”은 11세기에 처음 지어졌던 곳인데, 이슬람 왕실과 귀족들의 무덤 형식을 본 따서 만들었습니다. 3 개의 말발굽 모양의 아케이드를 3 단 아케이드로 만들었으며, 핑크빛이 나는 대리석을 가공하여 만들어 세운 기둥으로 받혀져 있습니다.

돔(Dome)모양으로 만든 천정은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있는 모습을 디자인하여 만들어 놓았는데, 16세기의 금속 장인이었던 Francisco Lopez가 얇은 금을 씌워서 벽을 장식하고 있는 타일과 어울려져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만들었습니다.

이 “대사의 방” 접견실로 들어서게 되면 그라나다에 있는 아람브라의 궁전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처녀들의 정원(빠띠오)”를 볼 수 있도록 디자인하였습니다. 이 궁전은 이 정원을 중심으로 하여 회랑들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으며 회랑 위에 있는 건물들의 어느 곳에서나 정원을 볼 수 있는 구조로 설계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곳(처녀들의 정원)이 바로 16세기에 스페인 군주들이 대리석으로 덮어 두었던 곳인데,  2004년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발굴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시켜 놓은 정원입니다. 알카사르 궁전의 동쪽 편에 있는 건물들은 19세기에 개조된 것들인데, “석고의 안 뜰(Patio de Yeso)”이라고 불리는 정원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외부와 내부는 원래 궁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건축되어졌지만 이슬람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전혀 들어 가 있지 않은 모습이어서 그런지, 그 분위기 또한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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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의 안 뜰(Patio de Yeso)

알카사르 성채

알카사르 성채는 15 세기 이전에 스페인과 아랍의 이슬람 세력 다툼이 심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의 칼리파가 기존의 왕궁을 요새화 하면서 만든 성채입니다. 중세 유럽의 성채들과는 다른 모습으로서, 사각형으로 성을 쌓고 방어에 용이하도록 탑과 망루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 안쪽으로는 궁궐과 정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또 다른 요새 형태로 성채를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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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 망루가 세워져 있는 알카사르 요새의 성문

스페인의 여러 곳에 있는 알카사르 중에서 세빌랴의 알카사르의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인데, 이 알카사르는 14세기 이전에 스페인 땅을 통치하였던 아랍 이슬람의 양식으로 건축되어진 궁전입니다. 그리고 14세기에 스페인 국왕이었던 뻬드로1세가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하여 놓았던 건축물입니다.

알카사르 요새의 성벽은 커다란 돌을 깎고 다듬어서 쌓는 형식으로 만들었지만 궁정을 지키는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으로 들어가는 성문은 구워서 만든 벽돌들을 쌓아서 만들어 놓았습니다.

황금의 탑 (Torres de Oro)

“황금의 탑”이라고 불리는 이 탑은 13 세기 초 이베리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슬람 무와히드(Al-muwahhidun)왕조 때에 과달키비르 강을 지나다니는 선박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지어졌는데, 1248년 세벨랴를 점령하였던 Castilla성(省)의 왕 페르난도 3세에 의해서 “황금의 탑”이라고 불려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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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탑 (Torres de Oro)

“황금의 탑”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유력한 이야기는 노을에 반사된 이 탑의 모습이 마치 황금으로 된 탑과 같다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불려졌습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은의 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 두 탑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강을 통하여 세빌랴로 들어오는 배들을 Control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이곳은 해양 탐험가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를 떠난 것을 기념하여 해양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집 (Casa de Pilatos)

세빌랴의 길가에서 본 오렌지나무에 탐스럽게 달린 과일들이 식욕을 자극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나는 감은 유달리 달고 맛이 있습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여름에 작열하는 태양은 100도가 넘지만 나무 그늘 밑에 가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기후가 과일을 달고 맛있게 익히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 되어도 마치 가을 날씨처럼 상쾌함을 느낄 수 있도록하는 날씨가 세빌랴의 날씨입니다.

“빌라도의 집”이라고 불리는 이 집은,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가 주연이었던 영화 “Day & Knight”이라고 하는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하였다고 하는 곳입니다. 유대인 구역 방향으로 약 20분 정도 걸어가면 “빌라도의 집”이라고 불리는 건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Casa de Pilatos”라고 불리는 가정집은 예수님을 십자가 형으로 죽이는 사형 선고를 하였던 유대에 파견되었던 로마의 총독과는 집접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축물입니다.  대항해시대에 살았던 어느 한 부유한 귀족의 집이었는데, 16세기에 지어진 이 집의 주인이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다녀 온 후에 예수를 재판하였던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집의 구조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을 본떠서 건축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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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기독교 왕국이 세빌랴를 통치할 당시에 건축된 가정집임에도 불구하고 구조나 문양, 그리고 건축물의 스타일이 로마식과 이슬람 양식을 혼합하여 건축되어졌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중앙의 정원 모습은 마치 알카사르(칼리파의 궁전)를 모방한 듯합니다. 이슬람 양식과 로마식 양식 등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 개의 기둥으로 된 회랑이 정원의 주위에 늘어 서있고 그 회랑의 벽에는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의 두상이 조각되어 벽의 움푹 파인 곳에 진열하여 놓았습니다.

기둥의 캐피톨은 약간 변형된 이오니아식(또는 도리스식)과 기하학적인 문양을 조각하여 놓은 이슬람의 양식(무데하르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반원의 아치로 지붕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건물이나 방의 벽은 화려하고 섬세하게 여러 가지 색깔의 문양으로 장식된 타일로 장식하였습니다.

정원의 가운데에는 분수가 놓여 있고 구석마다 하얀 대리석 동상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에는 수많은 조각상들로 장식하듯이 놓여 있었습니다.

돈 후안(Don Juan), 카르멘(Carmen) 그리고 피가로(Figaro)

세빌랴는 이처럼 새로운 대서양 시대를 맞이하여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로 부각되었는데 이렇게 화려하고 부유하였던 도시는 많은 작가들과 음악가들로부터 작품의 무대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사회상과 부유하였던 상황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몇 편의 문학 작품들과 오페라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돈 후안, 카르멘, 피가로, 알마비바 등의 소설과 오페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이야기 주인공들은 세빌랴의 거리를 활보하면서 걸어 다니고 있는 실제 사람들처럼 등장하는데, 그 첫 장을 여는 인물이 바로 호색한(Play-boy)으로 유명한 “돈 후안(Don Juan)”입니다.

“돈 후안”이라는 이름은 17세기 대표적 극작가인 Tirso de Molina(본명은 Gabril Tellez, 1580~1648)의 작품인 “세빌랴의 난봉꾼과 석상에의 초대”에 등장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희극으로써 원래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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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al “Don Juan”

세빌랴 성의 귀족의 아들이었던 “돈 후안”은 신앙심도 없으며 방탕한 바람둥이였는데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들만 쫓아다니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세빌랴에서그의 친구 라모타 후작의 사촌인 “도냐 아나”를 유혹하다가 반대하던 그녀의 아버지와 결투를 하다가 그를 죽이게 되어 도망 다니게 되었습니다.

세비야를 떠났던 그가 다시 돌아와서 숨어 살게 되었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그가 죽인 “도냐 아나”의 아버지 무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돈 후안”은 “아나”의 아버지가 복수를 기다리고 있다고 쓰여 있는 묘비명을 본 그는 묘비를 만든 석수장이를 그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게 됩니다.

그 후에 다시 그 석상은 “돈 후안”을 저녁에 초대하게 되는데, 그때에 “돈 후안”은 그 석수장이와 함께 불길에 휩싸여 죽고 맙니다. 비교적 단순한 이 이야기는 당시 사치스럽고 방탕한 귀족들의 세태를 풍자한 작품으로 작가 몰리나의 귀족들에 대한 경멸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식민지 개척을 통하여 엄청난 부를 이루게 된 세비야의 귀족들은 이러한 번영을 생산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기 보다는 사치와 향락적인 것으로 소모시켰던 것을 “돈 후안”이라는 방탕아로 표현하였던 소설이었습니다.

당시에 풍요하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카사노바(Casanova)”와 대응되는 난봉꾼이 바로 세빌랴의“돈 후안(Don Juan)”입니다. 그의 이름은 수많은 문학소설과 음악의 소재가 되어,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던 세빌랴의 부정적인 모습이 “돈 후안(Don Juan)”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 셈입니다.

아메리카 대륙과 전 유럽의 관문과도 같았던 스페인의 세빌랴(Sevilla)에는 신대륙에서 발견된 신기한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사람들의 주목을 가장 끌었던 것은 바로 “담배”였습니다.

지금의 멕시코 지방에 살고 있었던 아즈텍 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마을에 들어온 스페인 탐험가들에게 긴 갈대줄기에 담배 잎을 넣어 선물을 한 것이 지금의 담배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신대륙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갈대를 구하기가 힘들었던 스페인 사람들은 그것 대신 종이로 담배를 싸거나 담배 잎으로 싸는 방법을 개발해 내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개발품을 산업으로 발전하여 세빌야는 스페인 담배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각지에서 많은 청년들이 세빌랴의 거대한 담배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모여들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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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Carmen”

Tirso de Molina의 소설에서 등장하였던 “돈 후안”과 짝을 이루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Prosper Merimee의 소설 “카르멘”의 여주인공이었던 “카르멘(Carmen)”입니다.

이 소설은 비제의 오페라로 더 유명해진 작품입니다. 오페라 “카르멘(Carmen)”은 바로 19세기 중반의 세빌랴의 담배공장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오페라입니다.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인카르멘은 집시의 피를 이어받은 사랑과 열정이 남다른 처녀였습니다. 또 다른 주인공 돈 호세는 순진하지만 성실하고 우직한 성격을 가진 남자였으며, 앞날이 보장된 군인이었습니다.

담배공장 앞에서 돈 호세는 카르멘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절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집시의 성품을 가진 그녀의 마음 때문에 애를 끓게 됩니다.그러던 중 담배 공장의 여자 종업원들끼리 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녀를 사랑하게 된 돈 호세는 연행되어 가던 카르멘을 풀어주는 대가로 그가 대신해서 2 달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앞길을 열어주는 승진에서 밀려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카르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상사와 결투를 하는가 하면, 카르멘의 제안으로 밀수까지 손을 대면서 그는 밀수단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돈 호세는 카르멘이 이미 결혼을 했다는 사실과 남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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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이야기의 무대가 된 담배공장이었던 세빌랴대학교 문학부 캠퍼스

질투에 눈이 멀게 된 돈 호세는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카르멘을 빼앗아 오지만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집시였던 카르멘은 사랑에서도 한 사람에게 머무르지 못하여 당대 최고의 투우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호세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 호세는 둘이서 세빌랴를떠나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자며 매달렸지만 카르멘은 차갑게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돈 호세는 투우장에서 카르멘을 죽이고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 비극적인 카르멘 이야기의 무대인 담배공장은 지금의 세빌랴 대학교 캠퍼스가 되었습니다.이 대학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학교가 카르멘 이야기의 배경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활에서 남이 뭐라고 하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불같이 사랑하며, 그들의 특권인 젊음을 불태우면서 한번쯤은 카르멘이 되어보는 것을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교정으로 들어섭니다.

“팜므파탈(Famme Fatal)”의 전형인 카르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도시가 바로 세빌랴입니다.  세빌랴야말로 아메리카 신대륙의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와 흥청망청 거리고 호황을 누리던 곳이었으니, 돈을 벌기위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곳이었고 사기꾼, 도둑들이 설치던 곳이었습니다.

세빌랴의 부유함의 이면에는 이러한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는 부정적인 인물들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이들에 의해 부정적인 세태가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치명적 여인 카르멘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카르멘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욕을 불태우면서 상대를 옮겨 다녔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빌랴는 그 내면에 이렇게 들끓는 욕망을 간직했던 오만한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세빌랴의 이발사 (Il barbiere di Siviglia)

“돈 후안”이라는 바람둥이와 “카르멘”과 같은 집시 여인이 세빌랴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피가로”야 말로 세빌랴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낸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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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

피가로는 프랑스의 극작가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1732~1799)가 쓴 희곡의 주인공이었는데 그는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두 작품에 등장하는 알마비바 백작(Count Almaviva)의 하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도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스페인의 세빌랴를 너무나 사랑하였던 루치니와 모차르트에 의하여 각각 오페라로 작곡되어 연주되며 공연됨으로 더욱 유명해 진 희곡입니다.

“세비야의 이발사”에서는 피가로가 주인인 알마비바 백작(The Count Almaviva)을 도와 온갖 기지를 발휘하여 바르톨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로진느(Rosine)”를 빼앗아 와서 알마비바와 결혼시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알마비바 백작(Count Almaviva)이 로진느를 얻기까지 이렇게 애를 쓴 피가로의 은혜도 모르고, 또 다른 희곡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피가로의 약혼녀인 백작의 하녀 “수잔느”를차지하려고하여 문제가 생기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 피가로는 백작의 하녀 수잔느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백작은 그의 부인으로부터 싫증을 느끼게 되어, 알마비바 백작은 자신의 성안에 있는 뭇 여자들을 건드리기 시작하다가 피가로의 약혼녀이면서 백작의 하녀인 “수잔느”에게 눈독을 들이게 되는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수잔느가 자신의 종인 피가로와 결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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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의 한장면

피가로는 자신의 약혼자를 알마비바 백작으로부터 빼내기 위해 백작부인인 로진느의 도움을 받아 일을 꾸미게 됩니다. 즉 백작부인인 “로진느”와 하녀 “수잔느”가 옷을 바꿔 입고 백작을 속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백작은 “수잔느”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몰래 나가보니 그곳에는 바로 자신의 아내 “로진느”가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백작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고 마침내 피가로와 “수잔느”는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묘하게도 프랑스혁명의 전날 밤이었던1784년 4월에 파리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이 오페라의 이야기는 프랑스 시민들로부터 커다란 공감을 얻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빌랴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 이 두 작품의 공연과 관련하여 어떤 평론가는 말하기를, “이 날부터 대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였고,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도 “피가로의 결혼, 그것은 이미 혁명이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특히 중세 시대에 특권층에 대한 정치적 풍자가 두드러진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피가로가 그의 주인 알마비바 백작에 대하여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게 표현되고 있는 반면에 백작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자나 탐내는 형편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그래서 피가로는 혁명전야에 프랑스 시민계급의 전형으로 떠오르면서 단번에 민중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빌랴 출신이었던 피가로는 이처럼 중세의 권위에 자신 있게 도전하는 당당함과 그의 번쩍이는 기지, 그리고 이러한 당당함으로부터 비롯되는 반항성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곡을 듣게 되면 그 경쾌하고 발랄한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그러한 기운이 바로 세빌랴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빌랴는피가로처럼 그렇게 적극적이고 쾌활하며 기지로 가득 차있었던 도시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빌랴의 상징적 인물은 바로 피가로였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몸짓인 플라멘코 춤과 투우 경기

스페인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Plaza de Toros de la Maestranza 투우장은 노란색의 경기장인데 약 12,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경기장 앞에는 역대 유명한 투우사들의 동상이 늘어서 있었는데 이곳 세빌랴에서는 투우사의 인기가 축구선수나 영화배우들을 능가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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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za de Toros de la Maestranza 투우장

마치 부엉이의 눈과 같은 창문을 만들어 놓아서 아주 특이하게 보이는데 과달키비르 강가에 있습니다. 투우는 이곳 세빌랴에서 해마다 열리는 4월 축제 중 가장 크게 행하여진다고 하는데, 투우 경기는 일요일에만 있으며, 그 기간에는 로스레미도스 거리를 따라 450개의 천막이 설치된다고 합니다.

투우가 세빌랴에 소개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곳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기질인 열정이 투우와 함께 어울러져서 예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던경기입니다. 줄여서 “Toros”라고만 불리고 있는 투우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로 과달키비르 강변이 나옵니다. 이 강의 이름의 과달키비르라는 말이 아랍어로 “큰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 강의 강폭도 꽤 넓으며,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배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강 위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산 텔모(San Telmo)” 다리가 있고, 그 앞에는 12각형의 탑으로 강을 지키고 있는 탑인데 지금은 황금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 강 옆에서 있습니다.

이 탑은 건너편에 있었던 은색 탑과 함께 세빌랴 항구를 방어하고 지나가는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대항해 시대의 중심 도시답게 탑의 외벽을 금색 타일로 입혔기 때문에 그런 화려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탑 밑으로 쇠사슬을 늘어트림으로써 지나가는 배를 통제하였다고 합니다.

산 텔모 다리와 황금 탑을 지나 위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오페라 “카르멘”에서 돈 호세가 경비를 서다가 카르멘을 만났다고 하는 그 유명한 담배공장이 나옵니다. 1750년에 세워졌던 건물인데 지금은 세빌랴 대학의 문학부의 캠퍼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마리아 루이사 공원(Parque Maria Luisa)이 나옵니다. 1893년 남편을 잃은 공작부인이 산 텔모 궁전 정원의 반을 세빌랴 시에 기부해서 조성된 공원으로서 세빌랴 출신의 유명한 인물이나 기념될만한 것을 구역으로 나누어 공원을 조성한 것이 특이합니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마리아 루이사 공원은 1893년에  산 텔모 궁전의 정원의 절반을 도시에 기증한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이름을 따서 만든 큰 공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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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원 부근에 있는 “스페인 광장”은 1929년 “이베로 아메리카(스페인과 남미) 박람회”가 열렸을 때 만들어진 광장입니다. 당시에는 카탈로냐 지구 사령관인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정권이 스페인을 다스리던 때였는데, 리베라 장군의 경제발전 노력을 홍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출신 지역이었던 바르셀로나에서는 “세계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였고, 남아메리카의 개척이 시작되었던 일과 이 일에 깊은 관련이 있는 세빌랴에서는“이베로 아메리카 박람회”를 개최하였던 것입니다.

스페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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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건축물을 장식하였던 타일들

건축가 “아니발 곤잘레스”는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기 위해 거대한 반원형 건물을 세우고, 그 밑으로 구획을 나누어 그 곳에 화려한 타일로 스페인 각 지방의 특징을 타일 모자이크 벽화로 제작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유래나 왕조에 얽힌 설화를 재현하여 벽화를 장식하였습니다. 그 옆에는 인공 호수를 파고 물을 채워 넣음으로 사람들이 뱃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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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색깔이 짙은 도시들을 여행하다보면, 그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깔과 향기, 그리고 음률이 있습니다. 특히 세빌랴에서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빌랴의 유명한 시인이면서 극작가인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가 노래하였던 “짙은 붉은” 색깔에다가 “오렌지 향기”, 그리고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열정적인 선율이나 모차르트의 경쾌한 선율과 함께 “피가로의 결혼”의 경쾌한 음악이 바로 세비야의 느낌인 것입니다.

대개는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플라멩코를 많이 공연합니다. 플라멩코(Flamenco)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랑하면서살고 있는 집시들의 춤과 음악입니다. 플라멩코(Flamenco)춤은 그들의 한과 슬픔이 짙게 배어있는 춤인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화려하고도 경쾌합니다.

“경쾌함”과 “슬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단어가 플라멩코 춤에서는 멋지게 어울리는 것이 그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멩코는 집시들의 말로 “멋지다”라는 뜻인데, 멋진 춤 속에 그들의 한 많은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함께 희열이 배어있는 춤과 노래가 플라멩코(Flamenco)입니다.

탭 댄스처럼 발을 구르고, 몸을 돌리고, 손뼉을 쳐 박자를 맞추고, 정말 현란하기 그지없는 음악입니다. 현란하면서도 절도가 있어 무엇인지도 모를 강렬한 에너지를 모아졌다가 한꺼번에 발산하는 것 같으며, 춤을 잘 출 때는 관객들이 우리의 판소리 공연에서 “조~오타!”라고 하면서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올레!(Ole!)”하면서 추임새를 넣기도 하면서 함께 즐기는 음악입니다.

세빌랴에서 보는 플라멩코의 춤과 노래는 이 도시의 분위기와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플라멩코의 춤과 노래야말로 세빌랴의 몸짓이며, 세빌랴의 소리입니다.

관련 이미지

2018년 4월 21일에 있었던 “King’s Cup” 결승전의 모습, 바르셀로나와 세빌랴의 경기, 바르셀로나의 5:0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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