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모이고 싶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는다

옛날 목사님들은 성도와 콩은 볶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을 좀 볶아보려고 합니다. 일주일에 최소한 4번의 공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이미 4차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신앙적 이유로는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보다 세상 속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견 굉장히 합당하고 사려 깊으며 고급스러운 견해라고 느껴집니다. 마치 교회의 고집을 내려놓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무게에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깊이 숙고된 견해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오늘을 살며 너무 많은 예배에 고민하는 우리에게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먼저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했습니다. 원래 성도의 모임은 몇 번을 모일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일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의 본래의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일 수 있을까? 이것이 교회의 당연한 고민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며,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일주일에 몇 번을 볼까를 고민할까요?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할까요?

초대교회가 날마다 모였던 것은 당시가 오늘날보다 할 일이 없고 덜 바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숨을 내놓고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모임을 위해 순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공적 예배보다 삶 속의 영적 예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공적 예배를 나오지 않는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144시간 중에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2시간 그리고 이동 시간까지 넉넉잡아 4시간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그들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존재를 내어드리는, 즉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재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만나고 싶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습니다. 세상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세상 속에 살다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예배할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고민은 몇 번을 모여야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일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선교사님 부부의 간증을 놓친 분들이 너무 많아 안타까워 드린 말씀입니다. 공적 예배에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습니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 중요합니다. 이것 명심해 주십시오. 잘 볶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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