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첫 번째 성지 순례 팀은 이집트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집트의 북쪽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에 면한 항구도시로써 이집트에서는 수도인 카이로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 처음 세운 이래 헬레니즘 이집트의 수도로 이집트와 지중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현재에도 이 도시는 이집트의 천연가스와 송유관이 지나는 중요한 산업중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곳을 아랍어로 الإسكندرية (알이스칸다리야)라고 부르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최초로 라틴어(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셉투아진타, septuaginta)인 역 성경”이 기록되어졌던 곳이었습니다. 이때 번역되어진 “70인역(LXX)” 구약성경은 그리어가 국제 공용어로 사용이 되던 BC 3세기 부터 번역되어지기 시작하다가 AD 1세기에 완성이 된 번역 성경으로써 현재까지도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식 전례 본문으로 인용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 LXX 성경은 이스라엘의 12 지파에서 6 명씩 선출된 성경학자들이 각각 다른 독방에 들어가서 번역을 하였는데 그들의 번역된 것들이 모두 동일 하였다고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신부님들이 성도들에게 가르치기를, 본래의 성경이 73권이었는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73권의 성경에서 7권을 빼어버리고 66권만을 가져 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 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으로 가르치는 것은 실상에 대한 왜곡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제2경전”이라고 하는 구약(외경)의 7권은 일찍부터 로마 카토릭교회 안에서도 그 경전성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제들이 많아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도 39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고, “제2경전”이라고 불리던 외경 7권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일정한 때에 어떤 한 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다른 환경과 다른 시대에 살아왔던 여러사람들이 성령의 감동과 계시에 의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기록되어지고 집성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BC 800년경에 성문화 작업이 완성되어진 모세의 오경(Torah)이라고 일컬어지는 5권의 책들과 하나님이 택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성서와 시가서들의 39권이 BC 400경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정경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BD 587년에 남유다마저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대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BC 539년에는 페르시아에 의하여 유대민족이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유대 백성들은 여전히 주위의 페르시아를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의 침략과 통치를 받으면서 시달리다가 BC 332년 이후로는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지배아래서 마침내 헬레니즘 문화에 융합되어 모든 언어가 헬라어도 쓰게 되어 헬라 문화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변화 속에서 유대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방나라로 이주를 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BC 67년에는 새로이 지중해의 강자로 부상하게 된 로마제국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정복당하면서 유대 민족이 살고 있었던 땅은 마침내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민족은 크게 두 부류의 공동체가 형성 되었습니다. 즉, 유대인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팔레스티나 공동체와 또한 이방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헬레니즘 공동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팔레스티나 공동체는 아람어를 공용어로 하며 예루살렘 멸망을 여러번 체험한 공동체로서 그 성격이 보수적이고 국수적(國粹的)입니다. 반면에 각 지역으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대체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헬라어(그리스어)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헬라)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보다 진보적이고, 진취적이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AD 70년에는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때를 전후로 하여 또다시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 땅을 떠난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되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과 같은 사도들에 의하여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한 예수님의 복음이 먼저 동쪽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지방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 당시 세계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인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와 로마지방 등으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고국을 떠나있었던 디아스포라 공동체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기고 기독교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들이 구약성경을 봄에 있어서도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함께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이 70인역 헬라어 구약성경은 39권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함께 유다왕국 멸망이후에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의해 헬라어로 작성된 후기문서였던 15권이 첨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 AD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를 인정하는 정책에 의하여 기독교의 중심축이 로마교회로 옮겨지면서 헬라문화와 라틴문화에 익숙하였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하여 더욱 많이 애용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로마카톨릭교회의 경전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 “70인역 헬라어 성경”은 BC 3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처음에는 토라 5경만을 번역되었으나, 그후200년간에 걸쳐 점차 히브리어로 된 39권 성경이 모두 다 번역되어지고 나중에 15권이 더하여져서 BC 50년경에는 구약 성경이 모두 54권으로 불어났던 것입니다.  이때에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이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번역하여 만든 헬라어역 성경이 헬라어가 세계공용어처럼 된 가운데 더욱 많이 읽히게 되자, 이 경전(정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경학자들이 AD 90년에 얌니아(예루살렘부근의 지역)에 모여 이 문제를 토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경작업에 결과로써, 성서가 기록되어진 장소가 팔레스티나 땅 안에서 기록되어진 책으로써, 그리고 BC 400년, 에스라 이전시대에 기록되어진 책으로 한정하여,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진 39권만을 “정경성경”으로 인정하는 공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로마교회 안에서도 구약의 39권 이외에 15권의 후기문서에 대해서는 유다왕국이 멸망한 이후의 기록으로써 이교(Pagan)의 사상에 많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기록되었고, 이교도 사상이 많이 동화된 신앙형태가 나타나고, 또한 히브리어로된 성경 39권을 외곡표절한 흔적들이 이 문서의 내용에서 나타나 있으며, 또한 미신적이고 유치한 우화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경전의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혹평하고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제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언어와 문자의 변천사를 보면, 고대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썼으나 유대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후로 가나안 땅에서는 아람어(이스라엘 북쪽 셈족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그들의 고유언어였던 히브리어는 고어(古語)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팔레스타인 땅이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와 로마 제국에 의하여 정복당한 후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도 아람어와 함께 겸하여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와 약 2,000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에도 나라를 잃고 세계 여러나라를 떠도는 민족이 되었지마는, 그들은 성경을 중시하고, 구약성경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항시 읽고, 후손들에게 교육 계승하는 가운데 성경의 히브리어를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야웨신앙의 구심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100여년전부터 성경의 히브리어를 다시 체계화하여 되살리므로서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2차대전 후에 다시 나라를 되찾음과 동시에 자기들의 문자와 언어도 찾아 히브리어와 히브리 문자를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성경의 정경화 작업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AD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된 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었지만, 아직도 도처에 원래의 이교(Pagan)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때인AD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가톨릭)의 기반을 세우고 기초를 세웠던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는 AD 391년부터 AD 406년까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라틴어 성경은 “Versio Vulgata(불가타 판)” 이라고 불려졌으며, 이 불가타판 성경은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AD 5세기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 널리 보급되었으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불가타판 번역을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도 있었으니, 이른바 외경이 그것이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성””에는 있지만 “타나크”라고 하는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는 없는 몇몇 문헌들에 대하여 동방교회 교부들의 입장에 동의하였으며 “외경”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불가타 성경의 번역할 때에도 그는 성경의 히브리 원서였던 “타나크”만을 번역하고, 외경들은 번역을 회피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번역의 압력이 가중되자, 그는 마지못해 외경들을 번역하면서, “교회의 책”이라고 하는 “정경(Canon) 성경”과 구분하여 언급하였으며, 불가타 성경 서문에 교회의 책들에 대하여 “읽어서 신앙에 유익하지만, 교리를 도출하면 안된다(외경은 경전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교회의 책)”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성경책이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종교개혁 운동당시까지도 가장 권위있는 성경으로 교회의 경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이후 30년이 지나서 AD 1546년의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카톨릭교회가 후기15문서가운데 11문서를 “제2경전”으로 승격시켜 구약성경에 포함시키는 결정을 하므로서, 후기11문서가 카톨릭 교회의 정경이 된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11권의 책을 “외경”이라고 하여 정경에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2경전”이 7문서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모두 11문서입니다. 그것은 에스더 속편과 다니엘속편으로 편집되어 있는 “세아이의 노래”와 “수산나”와 “벨과 뱀”을 독립된 문서로 보지 않기 때문에 ”7 문서”라고 분류하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던 “70인 성경”이 이집트의 북쪽의 항구 헬라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정경 성경과 외경, 그리고 위경 성경 이야기까지 흐르게 되었습니다.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리아는 유럽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도시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파로스(Pharos) 등대”가 있었던 도시였으며, 로마의 안토니우스 장군과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정열적인 로맨스의 무대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에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와 지중해를 정복하면서 세운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우리 성지 순례 팀은 도시를 가로질러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로 이동하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가로질러 가고 말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기원전 3세기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헬라 문화, 그리고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입니다. 지금은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념하고 그것에 필적한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2002년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 개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