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묘(거룩한 무덤) 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예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방문하는 길은 크게 2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성묘 교회의 정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써 “Via Dolorosa”의 길을 따라서 각 지점들을 통과하여 갈보리 언덕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던 곳을 지나서 아래로 내려와 예수님의 시신을 염하였던 곳을 지나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의 순례자들은 성묘교회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1187~1832년에는 그 문이 항상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사실 상 전혀 없었습니다. 현재 성묘교회의 정문이 있는 광장에서 성묘교회를 볼 때,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나무문은 지금까지도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돌 벽돌로 봉해져 있습니다.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의 각 교파별 분할 관리 구역
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Selah Addin)은 십자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였습니다. 이때에 살라딘은 십자군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의 몸값을 지불한다면 40일 내에 그들의 부인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두로 항구와 트리폴리 지역을 벗어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었던 아랍인들은 비록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안전하게 그들의 집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유럽의 순례자들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Selah Addin)은 예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유로 성묘 교회당의 모든 문들을 폐쇄하고 문 하나만을 남겨 놓고서는 이 교회당을 방문하는 순례자들로부터 성지순례 세금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1192년에 아이유브(Eyyubi) 왕조의 술탄 살라흐 앗 딘(Selah-addin)은 자신과 친분이 깊었던 Muslim(이슬람교도) 중에서 “조우데흐(Joudeh)” 가문의 사람과 “누쎄이베흐(Nusseibeh)” 가문의 사람에게 성묘 교회(The Holy Sculpture) 정문의 열쇠를 맡겨 두었습니다.
예수 성묘 교회의 열쇠 성묘 교회당의 정문을 열고 있는 관리인(이슬람의 한 가정)
그때로부터 약 85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이들 두 가문이 성묘 교회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관리를 맡아오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열쇠를 보관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조우데흐(Joudeh)” 가문의 사람이 교회당의 열쇠를 문으로 가져오면, 문을 열고 닫는 책임을 맡고 있는 “누쎄이베흐” 가문의 한 사람이 아침과 저녁으로 한 번씩 문을 열어주고 닫고 열쇠로 잠그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예수 성묘 교회당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여섯 종파인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그리고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분할하여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파들이 “예수 무덤 교회” 안에서의 소유권과 관할권을 놓고 다툼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수 성묘 교회 정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 마음대로 성묘 교회의 문을 열고 닫는 이슬람 신자의 가정들이 실질적인 예수 무덤 교회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 27:57~60) “그 날 저녁에, 요셉이라는 아리마대 출신의 한 부자가 왔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요셉에게 넘겨주라고 군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천으로 둘렀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뚫어 만든, 자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그는 큰 돌을 굴려 무덤의 입구를 막고 돌아갔습니다.”
AD 1 세기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인 아리마대 출신으로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던 Joseph이라는 부자가 자신을 위하여 준비해둔 골고다 근처에 있었던 무덤을 예수님에게 내어 놓음으로 그곳에 안장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되신지 사흘 후에 부활하였다고 하는 소식과 함께 그 소문이 빠르게 예루살렘 성 안에서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 28:1~10)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그 때, 강한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천사는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경비병들이 그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었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천사가 그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보아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전할 말이다.” 여자들은 재빨리 무덤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두려우면서도 매우 기뻤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 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잘 있었느냐?” 여자들은 예수님께 다가가서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AD 70년에 유대인들의 로마를 대적하는 반란 사건이 있었는데, 로마의 Titus 장군에 의해서 폭동은 진압되었으며, 이때에 예루살렘 성과 함께 성전도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AD 132~135년에는 “Simon Bar Kokhbar의 반란”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로마 제국에 대하여 저항하는 유대인 폭동을 진압한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 “아엘리아 카피톨리아”로 완전히 바꾸어 버리고, 유대인들을 그 곳에서 완전히 추방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유대 민족은 방방곡곡으로 떠돌게 되는 “Diaspora”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갈보리 지역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비너스 신전을 세웠습니다. (150년~330년) 비너스 신전이 서 있었던 갈보리 언덕에 성묘 교회를 세웠습니다 (330년~1009년)
페르시아에 의해서 파괴된 성묘 교회를 재건하였습니다. (1050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다스릴 때(1099년~1187년), 확장 재건되었습니다.(1149년)
기독교를 혐오하였던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의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가 죽고 부활하였던 갈보리 성지에 아름다움과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던 로마의 “비너스(아프로디테)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AD 325년경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던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하여 비너스 신전은 파괴되었으며,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일어났던 예수의 빈 무덤이 있던 곳에 “거룩한 무덤 교회당”을 세우도록 예루살렘의 주교인 마카리우스(Macarius)에게 명령하였습니다.
AD 333년에 기록되었던 성지 순례의 기록에 의하면, “현재 이곳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놀랄 만큼 아름다운 성당이 건축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모친 황녀 헬레나에게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리는 유적지에 기념 성당을 건축할 것을 직접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건축된 “예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AD 614년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화재로 인하여 손상을 입었으며, 그때에 이 교회에 보관되어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 조각을 그들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AD 630년에 신성 로마제국의 헤라클리오스 황제는 페르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는데 이때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을 때 빼앗겼던 거룩한 십자가를 예수 성묘 교회에 반환되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에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을 때에도 성묘 교회(Holy Sepulchre)의 교회당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습니다. 초기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예루살렘의 기독교 유적지를 파괴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킴으로 기독교 성지를 보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성묘 교회”의 교회당에서 일어나던 “성령의 불 기적”으로 인하여 기독교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자 AD 1009년 10월에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 알라흐”의 명령에 의하여 “예수 성묘 교회”의 건축물들 중에서 파괴가 불가능하거나 운반하기 너무 힘들 것 같은 부분들을 제외하고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 성묘 교회”가 파괴된 사건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응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침내 그와 같은 성지 파괴 행위들은 나중에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AD 1009년에 있었던 “예수 성묘 교회”의 파괴 사건 이후로 더 이상 파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복구 작업 또한 진행되지도 않았습니다.
1027년~1028년에 파티마 왕조와 비잔티움 제국 간의 폭 넓은 협상으로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그 협정에서 칼리프 “알리 아즈-자히르(알-하킴의 아들)”은 교회의 보수와 재건축을 허락하는데 동의하였습니다. 비잔티움은 이슬람의 칼리프 “알-하킴”에 의해 파괴되었던 다른 성당들도 모두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총대주교구의 원상 복구를 약속받으면서 5천명의 무슬림 포로들을 석방해주었습니다. 무슬림 자료에 의하면 그 협정으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부가적으로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알-하킴”의 압력에 의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을 강요받았던 기독교인들이 다시 기독교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묘 교회(Holy Sepulchre)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출하는 총액이 막대한 수였기 때문에 “예수 성묘 교회”의 “Rotunda(원형 또는 타원형 위에 돔 지붕을 올린 건물)”와 그리스도 예수의 무덤인 “Aedicule(ædicule)”를 중심으로 하여 가장 먼저 복구가 이루어졌습니다.
1808년 성묘 교회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여 “Rotunda (원형 건물에 돔을 얹어 세운 부분)” 부분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보수가 필요해진 “Rotunda”의 Dome과 함께 “이디큘(그리스도의 무덤)”의 외관은 1810년 당시의 건축 양식이었던 오스만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묘교회 지하 발굴 작업과 습기, 촛불 연기 등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 동안에 훼손되어 보수 작업이 불가피해지게 되었습니다.
최근 2017년 9개월 동안 진행한 복원 공사는 대들보의 훼손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공사비용은 400만 달러(약 45억원)로 잡혔었는데 6명의 기부금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예수의 무덤을 감싸는 이디큘(Aedicule, ædicule 홀 내부에 지은 작은 건물)과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의 빈 무덤의 복원 작업은 그리스 국립공과대학 유물 보존팀 전문가 50여 명이 한 팀을 이뤄 진행되었습니다.
2017년 성묘 교회의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성묘교회 예수의 빈 무덤(시신을 놓았었던 곳)을 수 세기만에 다시 열고 보수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놓았다고 하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덮고 있던 윗덮개 석판이 발견되었고, 그 석판의 연대측정 결과 AD 300년대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밝혀졌으며, 이와 같은 발견으로 인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발견해 성묘교회의 시초를 놓았다”고 하는 고대의 기록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동굴을 깎아 만든 선반 형태의 무덤 형식과 장식들은 AD 1세기 예루살렘 유대인 부유층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라고 고고학자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 복음서 (마태복음 27:57~61)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예수님의 무덤자리의 원래 주인이 산헤드린의 공의회원이면서 부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소유였다는 기록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작업을 지휘하였던 아테네 국립 공과대학의 “안토니아 모로폴루” 박사에 따르면, 동굴 서쪽의 벽면에서 채집한 가장 오래된 회반죽 표본들은 AD 4세기의 것으로 측정되었는데, 이는 기독교화 직후의 로마시대에 성묘교회의 건설작업이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추가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아 모로폴루” 박사와 동행하여 취재하였던 National Geographic Channel의 기록에 의하면, “석판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AD 4세기 중반에 설치됐을 것임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구 결과는 성스러운 유적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환영할 만한 놀라움을 가져다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Times of Israel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분할 관리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정교, 아르메니아 교회는 2019년에 예루살렘 성묘교회 건물의 기초 부분과 바닥재를 복원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복원 공사는 이탈리아가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이슬람 국가의 지배 아래에 있어 왔지만, “예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기독교의 최고로 성스러운 성지의 하나로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Holy Sepulchre의 특수성과 상징성 때문에 6개의 주요 기독교 종파들이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여 왔습니다.
현재 “예수 성묘 교회”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6개의 종파들이 소유권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15세기부터 성묘 교회(Holy Sepulchre)를 향한 각 기독교 종파의 분란과 다툼이 점차적으로 심각하게 계속되었는데 예루살렘을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고 통치 아래에 있을 때, 술탄(Sultan, 왕)의 칙령으로 중재가 이루어져 분할하여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적인 긴 다툼으로 인한 이와 같은 상황가운데에서 오스만 터키는 1767년 성묘 교회의 주도권을 신청하는 기독교의 종파들이 건물의 각 부분을 분할하여, 관리할 것을 명령하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일단락 지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개신교 기독교 교단은 여기에서 구역을 배정받지 못하였는데, 개신교 전체를 대표할 만한 교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예루살렘에는 개신교 교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라면, 당시에 가톨릭교회와의 갈등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개신교 기독교 교단이 가톨릭교회가 주관하고 있던 성묘 교회를 처음부터 인정하기 꺼려하였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수 성묘 교회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관리하여 오고 있는 주요 기독교 종파들은 동방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이집트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의 Jacobian 정교회이며, 그 중에서 그리스 정교회가 가장 큰 관할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콥트(Copt) 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는 건물 안과 주변의 감실과 다른 건축물을 관할하는 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각각의 종파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영역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시간과 장소는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성묘 교회에서는 매우 특이한 교회법인 “현상 유지법(Statu Quo)”이 1853년부터 발효되어 실시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성묘 교회 안에서의 전례나 전통들 그리고 소유권 등이 그 유지법 발효된 시점의 상태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즉, 더 이상 변동될 수 없는 상태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상 유지법(Statu Quo)”이 적용되는 지역은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 교회당(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당(The Church of the Nativity)”, 그리고 겟세마네 옆에 있는 “성모 마리아 무덤 동굴(Tomb of Virgin Mary)”과 올리브 산에 있는 “예수 승천 경당(Chapel of the Ascension)”입니다.
1853년 이래 지금까지 현상 유지(status quo)제도가 실시되어 오고 있지만 현시대에 와서는 모든 곳에서 이 제도 때문에 발생되는 다툼으로 인하여 폭력 사건도 일어나는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2002년 더운 여름철에, 콥트교 수사가 앉으려고 하였던 의자가 햇볕아래에 있기 때문에 지정된 장소에서 그의 의자를 옆에 있는 그늘로 옮겼습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을 보게 된 에티오피아인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의해서 저지되었는데, 마침내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11명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4년에는 그리스 정교회가 십자가에 대한 고양 의식(consciousness raising)을 거행하는 동안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을 행하고 있을 때, 가톨릭의 프란치스코회가 관리하고 있던 문을 무심코 열어 놓았는데, 그리스 정교회는 그러한 가톨릭의 행동을 무례한 태도로 받아들여서 마침내 서로 주먹이 오고 가는 일로 커졌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8년 4월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Palm Sunday) 행사 때에, 그리스 정교회의 수사가 다른 종파와 말다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 말다툼으로 인하여 그리스 정교회의 수사가 건물에서 쫓겨나게 되는 발생하였는데 이때에 심한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인 2008년 11월의 주일에 거룩한 십자가 공경의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도 “현상 유지” 제도와 관련된 일로 인하여 아르메니아 수사들과 그리스 수사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유지(status quo)법에 의하여 공통 관리 구역으로 지정된 어떠한 곳들도 공동체들 사이의 합의 없이 정리할 수 없고 건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수리와 복구 하려는 일에 대하여 그들 간의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면 아무리 긴급한 수리가 필요한 열악한 곳들도 그냥 그대로 방치되어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 낡아서 고치려고 하여도 다른 종파 구역을 넘어서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서 제대로 고치지 못하게 되는 사례가 생기기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가톨릭은 교화당의 대문을 관리하는 책임지고 있고, 창문은 시리아 정교회가, 창문의 난간은 그리스 정교회가, 이렇게 나눠서 관리하다보니 창문이 낡아서 고치려고 해도 시리아 정교회 측에서 창문을 건드리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여도 난간에 사다리를 두는 것을 그리스 정교회 측에서 거부한다는 예입니다.
오늘 날 성묘 교회로 들어가는 출입구의 2층 난간에는 나무 사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이 사다리를 치우자는 종파간의 합의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유지” 칙령에 의하여 그것을 다른 곳으로 치울 수도 없기 때문에, 그로부터 무려 300년 이상 그곳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2층의 창문에 걸쳐 있는 사다리를 치우려고 하여도 치울 수 없기 때문에 무려 300여 년 동안 사다리(Immovable Ladder)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각 기독교 종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합니다.
이 사다리는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1728년에 그려진 판화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후 1757년에 오스만 터키에 의해서 칙령으로 발효된 “현상유지(Status Quo)”에 의하여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습니다. 즉, 약 30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부동의 사다리(Immovable Ladder)”도 청소와 수리 목적으로 잠시 동안 안으로 옮긴 적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시도를 하였던 사건이 있었던 한 달 후에 이 사다리를 치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저지당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1997년에는 이 사다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몇 주 뒤에 되돌아온 사건도 있었으며, 2009년에는 종탑의 비계를 치우기 위해 사다리를 잠깐 동안 사용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절실하게 수리가 필요했던 “이디큘(Edicule, 그리스도의 무덤)”을 수리하자는 협상마저도 결렬 되어 그 건축물의 수리가 계속하여 미루어져 오다가 2017년 “Edicule(그리스도의 무덤)”의 보수와 수리가 220년 만에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성묘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는 작은 공터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당 정면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는데 처음에 교회당이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보다 공터가 훨씬 더 넓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AD 7세기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제 2대 칼리파 Umar가 성묘교회 앞 광장에서 처음으로 Muslim들이 AD 10세기에 알라(Allah)에게 예배드렸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Mosque를 그 자리에 지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협소한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묘 교회 정면의 1층에는 Arch 문 2개가 있고, 2층에는 Arch로 된 창문 2개가 있습니다. 1 층에 있는 2개의 아치문 중에서 왼쪽 문은 교회 정문이고, 오른쪽에 있는 문은, 십자군 시대 군주들이 무덤이 있는 지하실로 내려갈 수 있는 문이었지만 지금은 벽돌로 폐쇄되어 있습니다.
성묘 교회의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는 종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십자군 시대였던 1160년에 세워진 이 종탑은 1545년에 지진으로 붕괴되었다가 재건하면서 Dome 지붕이 사각뿔 지붕으로 바뀌었고 높이도 원래의 것보다 낮아졌습니다.
1840-1850년에 그린 그림
성유석(聖油石, The Stone of Anointing, The Stone of Unction)
예수 성묘 교회의 정면에 있는 입구의 현관으로 들어서면, 바닥에 닳아서 윤이 나는 붉은색의 대리석 판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이 대리석으로 덮여 있는 판석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이곳에 눕히고 향유를 바르며 염을 하였던 “성유석(The Stone of Anointing)”입니다. 그 후면에 있는 모자이크 성화에서도 그 내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돌 위에서 예수의 시신을 염했다는 전승은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알려진 것으로,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성유석(The Stone of Anointing)은 1810년에 교회를 재건축할 때 덧씌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염했다는 것이 종교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성유석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뿌리는 성유를 손수건이나 천에 적셔 가져가려는 순례자들로 이곳은 항상 붐비는 곳입니다.
The Stone of Anointing의 네 귀퉁이에는 촛대 1개씩 4개를 세워 놓았습니다. The Stone of Anointing의 윗부분을 가로질러 걸려있는 등잔 8개는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서 봉헌한 것들입니다.
예수 성묘 교회를 방문하는 성지 순례자들의 수는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성묘 교회 측에서는 교회당을 관리하는데 소홀히 하였으므로, 1555년에 프란치스코회 작은 형제회의 수도사들이 그 곳을 더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는 “이디큘(그리스도의 무덤)”에 전실(前室, anteroom)을 만들면서 그 작은 건물을 확장하면서 보수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묘 교회의 여러 곳을 새롭게 단장한 후부터 교회당을 관리하는 권리가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와 그리스 정교회에게 공동으로 주어졌습니다.
1808년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건축물에 극심한 손상을 입혔고, “로툰다”의 돔도 이때에 함께 무너져 내렸으며, “이디큘(Aedicule, 예수님의 무덤 내부에 지은 작은 건물)”의 외관도 이때 허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1809년~1910년에 “Rotunda(예수님의 바위무덤을 덮고 있던 곳의 천정 Dome)”과 “Aedicule(예수님의 바위무덤)”은 Greece의 섬, 레스보스(Lesbos)의 작은 도시 미틸리니(Mitilini, Mitilene) 출신의 건축가 “콤니노스(Komninos)”에 의하여 그 당시에 유행하였던 “Osman Baroque” 양식으로 재건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알려주었던 천사가 앉아 있었던 곳이라고 알려진 곳에 만들었던 “천사의 방”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보관되어 있었던 평면도에 의해서 재건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대리석 장식들도 1555년의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마 28:1~6)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그 때, 강한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천사는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경비병들이 그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었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천사가 그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건축가 콤니노스(Komninos)는 “Aedicule(예수님의 바위무덤)”을 보수할 때, 적색 대리석을 외부에 싸는 방식으로 설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이디큘(Aedicule)”의 외적 미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1853년에 오스만 터키의 술탄으로부터 공포되었던 또 다른 칙령에서 기독교 공동체 간의 관리 영역의 분할을 확고하게 정하여 주었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후부터 예루살렘을 통치하였던 대영제국(영국)에 의하여 1947년에 기독교의 각 종파들과의 아무런 합의도 없이 건축물의 외부 철재 비계(scaffolding)가 설치되었습니다. 1959년부터 시작된 성묘 교회의 광범위한 현대식 Remodeling 작업의 일환으로 1994년부터 1997년의 기간 동안에 교회의 많은 부분에서 복구가 되기는 하였지만, 현재의 돔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묘 교회 정문은 2개의 Arch 형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른 쪽의 문은 막혀있고, 왼쪽 문 하나로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구조물에 하나의 문으로만 출입구로 사용하는 것은 때때로 매우 위험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1840년에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수 십 명의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문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깔려서 죽는 사고도 발생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999년에, 교회 공동체들은 회의를 통하여 새로운 출구를 설치하자는 데에 동의를 하였지만, 새로운 출구를 설치하는 공사가 시작된 적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결코 완공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었던 곳에 있는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제단과 그 밑에 있는 십자가가 섰던 자리
(마 27:50~54) “다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쪼개졌으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지키던 백부장과 병사들이, 지진과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고 매우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는 아담의 두개골이 묻힌 곳 위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Via Dolorosa”의 제 12 지점이 되는 그리스 정교회 관할의 중앙 제대 아래에는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있었던 지진으로 인하여 갈라진 바위의 틈을 볼 수 있도록 유리판을 설치하여 놓았습니다.
성묘 교회당 안으로 들어서서 오른 쪽으로, 전승에 의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곳이라고 하는 “갈보리(골고타)”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은 이 교회당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진 곳 중에 하나입니다.
현재 그리스 정교회와 가톨릭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아르메니안 정교회에서 성묘 교회의 정문을 열고 닫고 열쇠를 보관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Muslim 가정에게 매월 20쉐켈(4달러 정도)을 지불하고 있으며 특별한 예배(행사)가 있을 때마다 상징적인 액수의 돈을 더 지불하고 있습니다.
예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장소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후 예수님의 시신을 염하고 무덤에 안장하였던 곳이 서로 다른 곳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서 있었던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무덤이 그리 먼 곳은 아니었지만 서로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의 정문에 들어서게 되면 남쪽으로 넓은 방(Hall)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의 시신을 염하였던 곳에 만들어진 “Stone of Anointing(성유석)”이 있는 곳입니다. 그 뒷면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과 염을 하는 장면, 그리고 바위 무덤에 안장하는 모습이 모자이크로 그려진 벽화가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염하였던 돌인 “Stone of Anointing”또는 “The Stone of Unction”이라고 불리는 돌 판이 교회 입구 가까이에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붉은 호박색 대리석으로 싸여있습니다.
성묘 교회의 핵심 부분은 “Rotunda”라고 불리는 둥근 Dome이 있는 Hall입니다. 이곳의 천정에는 둥근 Dome이 덮혀 있으며, 이 돔의 중앙 아래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이 놓여 있습니다. 천정은 자연의 빛이 들어 올 수 있도록 구멍이 뚫린 돔(Dome)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그 높이는 11 m이고, 돔의 주위에는 18 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Dome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 “Rotunda” 는 여러 차례 수리가 되어 왔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엘레나 황후가 이 교회당을 세울 때부터 이곳에 있어 왔던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채찍 교회와 사형 선고 교회 (Flagellation Church & Condemnation Church)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이마에서 내려오던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하셨던 곳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자 문(스데반 문)을 통과해서 조금 걷다보면 오른쪽에 가톨릭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나옵니다. 이곳은 현지 아랍인들에게 “예수의 감옥”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그 수도원 안에 “채찍교회(Flagellation Church)”와 “선고교회(Condemnation Church)”가 있습니다. 그리고 1927년에 설립된 “프란체스칸 성서 대학“과 박물관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작은 형제회(프란체스칸) 수도원을 들어서서 보게 되면 오른쪽에 “채찍교회”가 있는데 이 “채찍교회”는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에 채찍질을 당하셨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곳 위에 지어진 기념 교회당입니다. 중세 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건축된 이 교회당은 한때(1618년) 마구간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고, 또 한 때는 직물을 짜던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가 그 후에는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서 기독교의 중요한 유적들이 발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원래 이집트의 Muslim이었던 Pasha(Lord) Ibrahim이 개종을 하여 가톨릭 프란체스칸 사제가 되었는데, 그는 1838년에 “막시밀리안(Maximilian, Duke of Bavaria) 공작”이 헌금하였던 돈으로 이곳의 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1839년 이곳에 교회당을 건립한 후에 이곳을 “Flagellation Church(채찍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1927~1929년에 지금 볼 수 있는 중세풍 교회당의 모습으로 완전히 새롭게 단장 하였습니다.
채찍 교회에서 유명한 것은 제단을 중심으로 하여 3 개의 Stained Glass(색 유리) 창문이 있는 것입니다. 가운데 있는 스테인 그라스 그림은 “채찍질을 당하는 예수님”(마태 27:26)이고, 왼쪽의 창에 있는 색유리 그림은 예수님을 재판한 후,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하여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손을 씻었던 장면을 묘사한 “손을 씻는 빌라도”(마태 27:24) 그림이 있으며, 오른쪽 창에는 군중들에 의해서 사면을 받아 풀려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인 “풀려나는 바라바”(마태 27:21)의 그림이 색유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천정의 돔에는 예수님이 머리에 쓰셨던 가시 면류관을 도안하여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마태 27:15~2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한 명을 총독이 사면해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당시 감옥에는 바라바라고 하는 아주 악명 높은 죄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빌라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에게 넘겨 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저 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어젯밤 꿈속에서 제가 이 사람 때문에 몹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중들에게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요청하라고 시켰습니다.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석방시켜 주길 원하느냐?”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바라바요!”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대답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떠다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 사람들이 한 결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지겠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리게 한 후, 십자가에 매달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사형 선고 교회(Condemnation Church)”는 Via Dolorosa의 두 번째 지점에 있으며, “채찍 교회”와 함께 프란체스칸 수도원의 경내에 있습니다. “선고 교회”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기 위해서 앉았던 자리였다고 하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십자군에 의해서 세워졌었던 교회당이 있었다고 하는 자리에 1903~1904년에 가톨릭의 프란체스코 작은 형제회에 의해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선고 교회당 옆이 있는 작은 정원의 빌라도 총독이 재판을 하기 위해서 앉았었다고 추정되는 곳에 로마식 도로를 포장을 위해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넓고 커다란 바위를 놓아두었습니다.
(요 19:12~13) “그 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을 풀어 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자,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 ‘돌로 포장된 바닥'(아람어로는 ‘가바다’)에 마련된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에케호모 교회, 시온 수녀회, 리토스트로토스(Lithostrotos (Pavement))
AD 1 세기의 역사가 요셉푸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AD 66년에 그리스계 로마인들과 유대인들과의 종교적 분쟁으로부터 시작된 제 1차 유대-로마 항쟁은 AD 70년 이 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던 Titus 장군에 의하여 진압되었습니다. 이때 Titus 장군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과 Antonio 요새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후 AD 135년에 또 다시 일어났던 제 2차 유대항쟁을 진압하였던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이름을 “Aelia Capitolina”라고 변경되었으며, 도시는 로마식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이때 로마식 광장과 성문들이 세워졌으며, 로마식으로 돌 판을 깔아 만든 중앙도로(카르도, Cardo)와 그 밖에 많은 로마의 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세워졌습니다.
다마스커스 성문(Damascus Gate) 안쪽에는 로마식 광장을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Antonio 요새 근처에 있었던 물 저장 “스트루씨온(Struthion, 그리스어로 ‘참새’ )”이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조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이 저수조 위에 아치를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덮으면서 석판을 깔았다고 합니다. “리토스트로토스(Lithostrotos)”, 이것은 석판으로 포장되어 깔려 있는 도로를 말합니다. 에체 호모 시온 수녀원 지하실에 예수님 당시에서 빌라도가 앉았었다고 하는 곳에 석판으로 포장된 도로의 일부가 발굴되었습니다.
Ecce Homo 시온 수녀원 지하실에서 발견된 돌 판으로 깔려 있는 로마식 도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때에 Damascus Gate 안쪽에 있는 로마식 광장으로 들어가는 3개의 Arch 문이 있는 형태로 만들어 세웠었는데, 이 Arch가 있는 문울 “Hadrian’s Arch”라고도 부릅니다. 이 “Hadrian’s Arch” 3개의 아치들 중에서 가운데 있으면서 가장 컸었던 중앙 Arch가 지금은 2/3 정도 남아 있는데 이 아치가 “엑체 호모 아치(Ecce Hommo Arch)”라고 부르고 있는 아치입니다. 그리고 아치의 나머지 1/3 부분은 1868년에 건축된 에케 호모 교회당 건물의 안쪽에 남아 있습니다.
Ecce Homo 교회의 중앙 제단 Ecce Homo Arch in 1864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출발점 위에 위치하고 있는 이 “에케 호모 아치”는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채찍과 조롱의 고통을 당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할 수 있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이 Ecce Homo Arch는 그 옆 액체 호모 교회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도 교회당 안에서 북쪽의 작은 아치의 나머지 부분(왼쪽의 Arch)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왼쪽 부분의 Arch는 Ecce Home 교회당의 중앙 제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70년에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하였던 Aelia Capitolina의 북동쪽 광장의 한 부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1884년에 요르단의 “마다바(Madaba)”라는 곳에서 6세기 비잔틴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지도인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Madaba Mosaic Map)”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모자이크 지도에는 예루살렘의 북쪽 성문인 다메섹 성문 안쪽에서부터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로마식 중앙대로인 “카르도(Cardo, Main Street)”가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Damascus Gate 안쪽 광장에서 Lion Gate을 거쳐 “통곡의 벽”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모습이 모자이크 지도(Madaba Mosaic Map)에 그려있었습니다. 이 길(Cardo)은 비잔틴 시대의 순례지였던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이었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Damascus Gate 안쪽 광장에서 Lion Gate을 거쳐 “통곡의 벽”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모습이 모자이크 지도(Madaba Mosaic Map)에 그려있었습니다. 이 길(Cardo)은 비잔틴 시대의 순례지였던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이었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Madaba Mosaic Map
중간 왼쪽에 있는 ❶번이 “다메섹 성문”입니다. 중간 위쪽에 있는 ⓫번이 “Lion Gate”입니다. ⓬번이 “성 안나 교회”이며, ⓭번은 현재는 파괴되어 없어진 “막달라 마리아 교회”입니다. 중간 아래쪽에 있는 ❹번이 “예수 성묘 교회”입니다. Madaba Mosaic Map에서 ❷의 대로가 로마식 도로인 “카르도(Cardo)”입니다. ❾번에 “Neo Church(새 교회)”가 있고, ❿번이 “헤롯 성전”이 있었던 곳이고 바로 그 오른쪽이 지금까지 “통곡의 벽”으로 남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❿지점의 왼쪽 부분이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곳입니다. ❶번의 다메섹 문과 ❾번의 “Neo Church”를 이어주고 있는 길이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이었고, 에케 호모 아치(Ecce Homo Arch)는 이 “Via Dolorosa” 위에 다메섹 성문 쪽으로 있었습니다.
스트루씨온(Struthion) 저수조
하스모니아 왕가 시대(BC 2세기)에 건설된 수로를 통해 대성전 저수조로 물을 끌어들였는데, 헤롯 대왕이 안토니아 요새 주변에 호수를 건설하면서 이 수로의 일부와 저수조가 땅속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을 Aelia Capitolina로 부르며 로마식으로 도시를 바꾸어 놓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저수조 위에 로마식 광장을 만들면서 저수조 위에 둥근 천장을 만들어서 다시 물을 저장하는 저수조로 사용하였습니다. 현재 에케 호모 수녀회의 건물들의 대부분은 이 “Struthion(작은 참새) 저수조” 위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Struthion(작은 참새) 저수조
빌라도 법정, Antonio(Antonius) 요새
헤롯 대왕(기원전 37~ AD 4년 재위)은 BC 37년에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써 로마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는 한 때 Hasmonean Kingdom의 왕궁과 요새가 있었던 자리에 헤롯 대왕의 후원자인 로마의 마르코스 안토니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며 BC 31년에 요새를 건설하고 그곳을 “안토니우스 요새”라고 불렀습니다. 약 50 m 높이의 암석 위에 세워진 이 요새는 자연적인 방어 능력이 약하였던 성전 산의 북쪽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건설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만약에 있을 수 있었던 폭동과 같은 소요 사태를 감시하기 위하여 헤롯 대왕의 군사들이 성전 뜰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에 좋은 위치에 Antonia Fortress를 세웠습니다. 안토니아 요새의 크기는 폭이 약 120m × 45m 정도였고, 그 요새 안에는 군인들의 막사는 없었지만 군사용 부속건물 외에 호화스런 주거지와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AD 1 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다 전쟁사 5.5.8)에서 이 안토니오 요새의 웅장함을 보고 표현하기를, “그 장엄함이 마치 왕궁처럼 보였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성(Fortress)은 유대인들의 제 1차 폭동이 일어났을 때인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엘 오마리에 아랍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바로 맞은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란체스코 작은 형제회에 의해서 세워진 “엑체 호모 시온 수녀원”과 그리스 정교회의 “예수님 감옥 수도원”이 있습니다.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자리에 현재는 “엘 오마리에” 아랍 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