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스탄 (Muristan) 지역과 리딤어 교회 (Church of the Redeemer)

예수님 시대의 이곳(Muristan 지역)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졌었던 골고다 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당시에 이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습니다.  AD 2 세기에는 Roman Forum이 이 지역에 들어서 있었던 곳이며, 지금의 이곳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었습니다. “Muristan”이란 말은 페르시아어로 “Hospital”을 뜻하는 말입니다. 십자군 시대에 이곳 Muristan은 십자군의 자선 기사단의 본거지였으며, 병원과 같은 치료 기관이 많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원래의 Muristan 지역은 지금의 “Avtimos Market”과 독일 루터란 교회 소속인 “리딤어 교회(Church of the Redeemer)”가 있는 곳, 모두를 포함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무리스탄 시장(Market) 입구                                                  무리스탄 시장(Market)의 상점들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의 왕자 Friedrich Wilhelm이 1869년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던 Ottoman(오스만 터키)의 Sultan(왕)은 그에게 Muristan의 동쪽 지역의 땅을 선물하였습니다. 그 후에 프러시아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 왕자 Friedrich Wilhelm은 Kaiser Wilhelm 2세가 되어 1898년에 그의 왕후  Augusta Victoria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때 무리스탄 지역에 독일의 Lutheran Church였던 “Church of the Redeemer”를 봉헌하였습니다.

무리스탄 지역에 있는 Redeemer 루터란 교회                                     1900년의  Redeemer 루터란 교회

1898년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독일의 Wilhelm 2세 황제와 그의 부인 Augusta Victoria과 그 일행

한편 1903년 그리스 정교회의 예루살렘 주교가 오랫동안 폐허로 버려져 있던 Muristan의 몇몇 지역을 정리하여 그리스풍의 시장(Market)을 형성하고 그곳을 “Aftimos(Avtimos)”라고 불렀습니다. Aftimos(Avtimos)는 “Euthymius(good cheer)”라는 이름에서 따 온 말입니다. “Euthymius”이라는 이름으로 부렸던 사람은 성묘(무덤)교회 안에서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부활 교회를 관리하던 사람이었으며, 19 세기에 예루살렘의 크리스천 구역을 개발하며 관리를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Avtimos 시장(Muristan Market)”에는 약 70개의 상점들이 입점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상점들은 성묘 교회를 옆에 두고 있기 때문에 위치가 아주 좋아 목이 좋은 상점들인 셈입니다. Avtimos 시장 중앙에는 Sultan Abed al-Hamid 2세의 집권 25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분수가 있습니다. 이 분수는 1903년에 새롭게 설계된 Avtimos 시장의 중앙에 세워진 상징물입니다.

예수 성묘 교회에서 가까운 곳의 기독교 구역에 “Church of the Redeemer”라고 불리는 독일의 Lutheran Church가 있는데, 이 Church of the Redeemer 교회가 서 있는 그 자리는 AD 2 세기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에 Roman Forum을 세우고 로마의 도시처럼 만들었던 곳입니다. 그 “Church of the Redeemer” 교회당은 십자군시대에 처음으로 세워져 있었던 이곳의 교회 터 위에 19세기 말경 프러시아(독일)의 황제 Kaiser Wilhelm 2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인 11 세기 초반에, Amalfi 출신의 이탈리아 상인들이 아랍으로부터  “Santa Maria Latina”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교회와 병원을 지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아 성묘 교회의 남쪽 입구에서 가까운 곳, 지금의 Church of the Redeemer가 서 있는 그 자리에,  교회와 병원을 처음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Santa Maria Maggiore(Saint Mary Major, Mother of Jesus)”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증축하였습니다. 이 이탈리아 교회와 병원은 십자군 시대에도 병원과 십자군이 운영하는 자선 기관의 본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AD 11세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이 세운 Santa Maria Maggiore 교회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19 세기에 다시 세워진 Lutheran Church인 “Church of the Redeemer”입니다.

Redeemer 교회의 내부 모습                                                   리딤어 교회(The Church of Redeemer)

리딤어 교회의 건물은 19세기 베를린의 교회 건축가 Friedrich Adler가 신(Neo) 로마네스코 방식으로 설계하여 폐허가 되어있었던 십자군 시대의 교회(Santa Maria Latina)의 터 위에 옛 교회의 잔해들을 재활용하여 건축하였습니다. 예배당 안의 제단이 있는 곳은 1970년에 새롭게 수리한 곳이고, 세례를 베푸는 세례 대 뒤에 있는 십자가 형상은 1998년 독일의 조각가 Hubertus von Pilgrim이 헌정한 조각품입니다.

Redeemer 교회의 입구는 Muristan street 선상에 있습니다. 리딤어 교회의 종탑의 높이는 48 m인데 이곳 위에 올라서게 되면  옛 예루살렘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Dome of Rock”이 보이고 올리브 산이 보입니다.  서쪽으로 성묘 교회 두 개의 Dome이 보이며, 남쪽으로는 “다윗의 망대”와 “세례 요한 교회”가 보입니다. 북쪽으로는 멀리 오른쪽 배경에 지금은 Hebrew University가 들어서 있는 Scopus 산이 보이고, 멀리 왼쪽으로는 예루살렘의 신도시가 보입니다.

 

아치 모양으로 장식된 Redeemer 교회의 입구 위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양쪽에는 프러시아의 상징(Prussian symbols)이 조각되어 있는데, 왼쪽에 있는 독수리는 독일의 황실을 의미하는 표시이고 오른쪽에 있는 Maltese 십자가는 St. John의 십자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 양의 문양은 루터란 교회(Lutheran Church)의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문양은 (요한복음 1:29)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30) “다음 날, 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분이 바로 내가 ‘내 뒤에 오시지만,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신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분입니다.”

Redeemer 교회의 또 다른 입구의 위에는 “알파와 오메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의 알파벳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헬라어의 처음 글자인 알파와 마지막 글자인 오메가는 “하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처음이며, 또한 마지막이다. 나는 지금도 있고, 전에도 있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이다.””

(요한계시록 21:6) “또 그분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다. 내가 목마른 자들에게 생명수 샘물을 거저 주겠다.”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

그리스어 “Chi-Rho(키-로)”와 양쪽의 “알파, 오메가”                                            Lutheran Church of Redeemer의 Symbol

십자군시대의 교회가 있었던 곳에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지금은 무리스탄 시장의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유적의 처마 밑에는 원형으로 된 도안의 가운데에는 그리스어로 “Chi-Rho”라는 두 글자가 도안되어 있습니다. 이 글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그리스어로 그리스도, “Christos”의 앞에 있는 두 글자를 도안한 것입니다.

Roman Paved road

세례 요한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AD 3 세기~4 세기의 로마 시대에 돌을 깔아서 만든 로마식 도로가 지금 사용되고 있는 도로의 밑 부분에서 1977년에 발굴되었습니다.

Cardo Maximus (Main Street)

로마인들은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해 나가면서 말과 마차가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돌판을 깔아 튼튼하고 정교하게 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로망도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으로 로마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53,000 마일(85,000 Km)의 길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 하였는데, 이러한 도로들은 로마제국의 주요 도성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Jerusalem Cardo Maximus는 로마시대의 예루살렘(Aelia Capetalina)의 중심 지역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며 나있는 중앙 도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Simon Bar Kokhba가 이끌었던 유대인 폭동사건은 AD 135년 로마 황제 Hadrianus에게 진압된 다음,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Colonia Aelia Capitolina로 바꾸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면서 도시의 중앙을 남과 북으로 난 Cardo Maximus를 22.5 m의 폭으로 건설하였습니다. 이 중앙도로(Cardo)는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였는데 북쪽의 다메섹 문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Zion gate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도로였습니다.

AD 2 세기 때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로마화가 완성되었는데 AD 6세기 중반에 완성된 비잔틴 시대의 도로망을 모자이크한 “Madaba 지도”에도 이 Cardo Maximus(예루살렘의 중앙도로)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도로의 북쪽 부분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완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발굴되지는 않았으며, 도로의 남쪽 부분은 비잔틴의 황제 Justinus에 의해서 6 세기에 완성되었던 도로였습니다. 이 도로는 당시의 세워졌던 교회들 중에서 2 개의 큰 교회였던 “새 교회(Nea Church)”와 “예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였습니다.

7 세기의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이후, 이 중앙 도로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도로 옆에 있었던 많은 상점들이나 주요 건물들은 파괴되어 폐허로 남아 있다가 십자군 시대에 예전에 사용되었던 건축 재료들을 재사용하여 도로 옆에 지붕이 있는 상점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지금도 로마 시대의 Cardo 길을 따라서(Damascus Gate에서 부터 Zion Gate까지) 커다란 상가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원래의 길은 직선으로 곧게 나 있었지만, 지금은 집들이 중간 중간에 들어서면서 길이 좁아지다가 마침내 꾸불꾸불한 모습으로 변형되었습니다.

Cardo Maximus의 발굴 작업이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채의 집들을 허물고 묻혀 있었던 원래의 도로 잔해들과 길옆에 서있었던 기둥들을 2년에 걸쳐서 발굴하여 내었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되어진 도로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땅 아래로 깊이 2.5m 정도에 묻혀 있게 되었던 Cardo Maximus는 길이 150m, 넓이가 22.5m 정도가 발굴되었습니다. 길 양쪽에 늘어 서 있었던 기둥의 높이는 5m 정도였으며, 길 가운데는 천정이 없었으나 도로의 양쪽에 있는 기둥들 위로 지붕을 씌웠었습니다.

The Church of Saint John the Baptist (Christian Quarter)

AD 5 세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전승에 따라 이곳이 세례자 요한의 목이 묻혔던 곳이라고 하는 전승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교회인 “세례 요한 교회”가 세워졌었지만 이 교회는 AD 7 세기에 아랍과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을 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St. John 교회와 수도원이 있었던 곳은 자선 단체가 있었던 곳이었는데, 1267년에 아랍의 Mamlukes이 침략하여 왔을 때부터 Ottoman 시대의 19 세기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St. John 교회당

기독교 전승에 의하여, 세례 요한의 머리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곳에 요한을 기념하여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교회당입니다.  AD 5 세기경 비잔틴 시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고 종탑은 11 세기 십자군 시대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오랜 기간 동안에 폐허가 되어 버려져 있던 이곳에 몇몇 수도사들에 의해서 수도원이 세워졌습니다.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면서 지내 오다가 1839년에 그리스 정교회 교회당으로 다시 건축하여 세웠습니다.

(마태 14:1~12) “그 때, 헤롯 왕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헤롯이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어. 그 사람에게서 기적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거야.” 헤롯은 예전에 요한을 체포하여 결박하고, 감옥에 가둔 적이 있었습니다. 헤롯이 이렇게 한 것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 헤롯에게 “당신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은 것은 잘못이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요한을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딸이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지시를 받은 딸은 헤롯에게 말했습니다. “쟁반 위에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담아 주세요.” 왕은 망설였지만 자기가 한 맹세 때문에,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던 손님들 때문에 요한의 머리를 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감옥 안에 있는 요한의 머리를 베게 하였습니다.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서 왕에게 왔고, 왕은 그것을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처음으로 이곳에 세워졌던 교회당은 AD 7 세기에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지만, 이후에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아랍의 허락을 얻어 비잔틴 교회의 폐허 위에 다시 세례 요한 기념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십자군 시대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부상당한 십자군의 기사와 군사들을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때에 병원으로 사용된 정확한 곳은 St. John the Baptist Church의 북쪽에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Muristan”입니다.

11 세기에는 십자군이 이 교회당을 사들여서 수리하여 수도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십자군이 물러간 후에도 승려들은 계속해서 이곳에 남아 있으면서 수도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Ottoman(Osman Turkey) 시대인 1839년에 교회당과 수도원을 다시 수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 교회의 정문은 크리스천 구역의 “Jaffa Gate”와 “다윗의 망대”로 이어지는 David street가 시작되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성묘 교회의 남쪽 입구로 갈 수 있는 St. Helena street와 가까이 있습니다.

St. James (성 야고보 교회), Armenian Church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처음으로 순교를 당하였던 야고보 사도가 이곳에서 죽었는데 그 장소에 그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행 12:1~2) “이 무렵, 헤롯 아그립바 왕은 교회에 속한 몇 사람을 박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AD 6세기에 비잔틴 교회가 이곳에 처음으로 세워졌었는데 AD 7세기에 페르시아와 아랍인들이 침략하여 들어왔을 때 이 교회당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1세기에 십자군에 의해서 비잔틴 교회의 폐허 위에 교회가 다시 세워졌으며 13 세기부터 Georgian 승려들에 의해서 관리되어 오다가 나중에 아르메니안 정교회에서 관리하여왔습니다.

십자군 시대에 다시 지어진 교회당의 원래 입구는 3 개의 아치로 남쪽에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17 세기에 3 개의 문들을 막아버리면서 반대편에 하나의 아치로 출입구를 다시 만들고 그 뒤에는 그림이 그려진 세라믹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불에 탄 집 (Burnt House)

1969년에 있었던 6일 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역을 재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고고학 발굴 작업도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습니다. 197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의 Dr. Nahman Avigad가 이끄는 고고학 발굴 팀은 파괴되어 잿더미에 묻혀 있었던 곳에서 오래 전에 불타버린 집을 발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래전에 불에 탄 이후 버려져 있었던 그 집은 유대인 지역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 불에 탄 집은 AD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 모두가 불에 타 무너질 때에 함께 불타버린 집들 중에 하나였다고 여겨지는 집이었습니다.

발굴 팀은 이 “불 탄 집(Burnt House)”에서 그 집의 부엌과 작업실 그리고 정결 예식을 위한 정결탕(Mikveh) 등을 발굴하여 내었는데, 이 집은 성전에서 사용되는 향유를 만들던 곳이었다고 밝혀졌습니다. 이곳에서 당시에 유명한 제사장 가족의 이름(“Bar Qathros”)이 새겨진 직경 약 10 cm되는 저울의 추로 사용되었던 하얀 돌이 저울과 함께 발굴되었는데 그것에는 “belonging to the son of Kathros”라는 글귀가 새겨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굴로 인하여 이 집은 당시에 제사장이었던 “Kathros family”의 집이 이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발굴된 곳은 복합 주택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젊은 여인의 것으로 보이는 팔 부분의 유골도 함께 발굴 되었습니다.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유골과 함께 철제 창도 함께 발굴되었는데 아마도 여인이 로마 군인에 대항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이름이 새겨진 저울추와 함께 돌로 된 주전자, 동전, 부엌용품, 연장, 등 일반 가정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많은 유품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집은 구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구에 있는 Tiferet-Yisrael Street에 있었습니다. 이 집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도로에서 땅 속으로 수 미터 밑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할 당시에 그 지역은 성전의 서쪽 구역인 “Upper city”였으며, 성전에 종사하는 부유한 제사장의 가족들이 살았던 집이었다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 Burnt House의 벽은 돌을 쌓아서 만들어졌고 흰 석회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땅을 다져서 만든 방에는 약간 내려앉은 곳에 붉은 흙으로 만든 둥근 솥이 걸려 있었고, 집 마당은 잘 다듬어진 돌들로 깔려 있었으며, 부엌과 다른 방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크기의 방이 세 개가 있었으며, 네 번째의 방은 아주 작았습니다.

Broad Wall

Broad Wall은 남 유다의 히스기아 왕 시대에 예루살렘 성을 확장하기 위하여 새롭게 쌓아올린 성벽의 일부분으로써 성(Fortress)의 서쪽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쌓았던 성벽의 일부분입니다. 지금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폭이 7m 그리고 길이가 65m 가량입니다. 이 성벽(Broad Wall)의 일부분은 불에 탄 집(Burnt House)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성전 산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성벽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6 세기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는 성벽입니다. 아마도 (느헤미야 12:38)에도 언급된 적이 있었던 “Broad Wall”이 아닌가하는 건축물입니다.

(느헤미야 12:38~39) “다른 합창단은 왼쪽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백성 절반과 더불어 성벽 위로 그들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는 ‘가마 망대’에서부터 ‘넓은 성벽(Broad wall)’까지 갔습니다.  우리는 ‘에브라임 문’을 지나 ‘옛 문’을 거쳐 ‘물고기 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 문’까지 갔다가 ‘경비대 문’에서 멈추었습니다.”

2007년에 “에일랏 마잘(Eilat Mazar)”이 다윗 성으로 추정되는 곳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녀는 다윗의 궁전(Palace of David)이 있었던 곳을 찾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다윗 성터 위에 5m 두께, 그리고 30m 길이의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남 유다 왕국이 멸망당하기 전의 웅장하였던 예루살렘 성(667,731 ㎡)을 모두 복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그들의 안전을 위한 기본적인 성벽(방어벽)을 가장 먼저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위쪽에 비교적 공사가 용이한 지역에 성벽을 먼저 쌓아올렸는데 바로 그 부분이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에일랏 마잘(Eilat Mazar)의 발굴 Team에 의해서 발견된 것입니다.

1997년부터 Eilat Mazar이 이끄는 발굴 Team에 의해서 발굴되고 있는 “다윗 성(Palace of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