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의 문들(The Gates of Old Jerusalem)

기원전 6 세기(BC 588년), 당시에 동방의 세계를 지배했던 바벨론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1년 반 동안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정복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약 400년 동안 왕권을 유지하여 왔던 남 유다 왕국은 마침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왕하 25:1~16) “시드기야가 왕으로 있은 지 구 년째 되는 해의 열째 달 십 일 에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역했으므로,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모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 주변을 에워싸고 흙 언덕을 성 둘레에 쌓았습니다. 성은 시드기야가 왕으로 있은 지 십일 년째 되던 해까지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 넷째 달 구 일 이 되자 성 안에 기근이 심해졌습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나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때맞춰 성벽도 뚫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군대가 밤중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왕의 정원 곁에 있는 두 성벽 사이에 있는 성문 길로 빠져 나갔습니다. 그 때까지도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성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와 그의 군대는 아라바 길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여리고 평야에서 붙잡았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모든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사로잡아 리블라에 있는 바빌로니아 왕에게 끌고 갔습니다. 바빌로니아 왕이 시드기야를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눈을 뺀 뒤 쇠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이 왕으로 있은 지 십구 년째 되던 해의 다섯째 달 칠 일에 경호대장인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느부사라단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에 불을 지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물은 다 불타고 말았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헐어 버렸습니다. 그 군대는 왕의 경호대장이 지휘했습니다. 경호대장인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빌로니아 왕에게 항복한 백성과 나머지 백성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가장 천한 사람들은 남겨 두어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바빌로니아 군대는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놋기둥과 놋받침대와 바다라고 부르는 커다란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쇠를 바빌론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또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쓰는 솥과 부삽과 불집게와 접시와 온갖 놋기구들도 가져갔습니다. 왕의 경호대장은 화로와 대야들도 가져갔고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도 다 가져갔습니다. 또 놋기둥 두 개와 커다란 놋대야 하나와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해 만든 놋받침대도 모두 가져갔습니다. 경호대장이 가져간 놋은 너무 많아서 무게를 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 성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던 여러 제국들의 군왕들과 그의 군대들의 각축장이 되었었고, 그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침략자들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바사(Persia), 헬라(Greece), 로마와 비잔틴, 이슬람교도, 십자군, 마멜루크, 오스만 튀르크, 영국 등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강대국들은 예루살렘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들이 남겼던 많은 흔적들은 지금도 예루살렘 도처에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Old City(예루살렘 성)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예루살렘 성벽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성벽(城壁)과는 매우 다른 예루살렘 성벽입니다. 현재의 예루살렘 성(Old City)의 경계가 되는 곳은 AD 1537년~1542년 오스만 터키의 황제 슐레이만 1세에 의하여 건설된 성벽입니다. 성벽의 둘레가 약 3.4Km이고 높이는 약 12m 이며, 모두 34개의 탑을 가지고 있는 커다란 건축물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에는 총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의 사자 문(Lion’s Gate, 스데반 문, 양의 문)과 황금 문(Golden Gate, 미문, 美門), 서쪽의 자파(욥바) 문(Jaffa Gate), 북쪽의 다마스쿠스 문(Damascus Gate), 헤롯 문(Herod’s Gate), 새문(New Gate), 그리고 남쪽의 분문(糞門, Dung Gate)과 시온 문(Zion Gate) 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지나온 것처럼 지리적으로도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닙니다.  우선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쪽지역과 서쪽지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즉, 동 예루살렘과 서 예루살렘으로 나누어집니다. 면적으로는 동 예루살렘이 약 70 ㎢이며, 서 예루살렘은 이보다 작은 45 ㎢ 정도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일어났던 제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었던 아랍 사람들이 동 예루살렘을 관할하게 되었고, 독립국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 예루살렘을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동 예루살렘은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의 한 부분으로 Jordan이 관리하고 있었으며 서 예루살렘은 독립국이 된 이스라엘의 국토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은 동서로 확연히 분할되어 서로 왕래조차 금지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1967년에 일어났던 6일 전쟁이 마칠 때까지 이와 같은 상태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동과 서로 구분되어진 예루살렘에는 제 3의 구역이 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 성, 즉 “구 예루살렘(Old Jerusalem)”입니다. 구 예루살렘이야말로 예루살렘 전체에서 그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오랜 역사의 묵은 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곳입니다.  구 예루살렘에는 높이가 14 m에 달하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이름에 걸맞게 고도(古都)인 예루살렘의 풍모를 엿볼 수 있도록 서 있습니다.

       AD 1537년~1542년에 오스만 터키의 Sultan Suleiman 1에 의해서 축성된 예루살렘 성벽 (붉은 색 line)

그러나 이 성벽은 3,000년의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서는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과 성문은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였던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기 위하여 1537년~1542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60년 전에 새롭게 건설된 예루살렘 성벽의 총 길이는 약 3.4 ㎞입니다.

한 편 2021년 7월에 Israel Antiquities Authority에서 발표한 고고학 뉴스에 의하면,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David 국립공원에서 첫 번째 성전 시대(Solomon 시대)의 당시에 건설 된 성벽으로 알려진 예루살렘의 동쪽 벽의 한 부분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성벽의 유적은 남 유다 왕들이 통치하던 동안에 블레셋의 수많은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보호했었던 성벽의 유적들이라고 예루살렘의 고고학자들이 말하였습니다. 새롭게 발견된 성벽의 유적들은 이전에 발견되었던 다윗 성의 성벽과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유적은 약 30m(100피트) 길이의 성벽 유적인데, 높이가 2.5m(8피트), 너비는 최대 5m(16피트)정도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Babylonian의 침략에 의해서 586 B.C.에 파괴된 Solomon 시대의 예루살렘 성벽이 발굴되었습니다.

(열왕기하 25:10) “바빌로니아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헐어 버렸습니다. 그 군대는 왕의 경호대장이 지휘했습니다. 경호대장인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빌로니아 왕에게 항복한 백성과 나머지 백성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 침공한 것을 기록한 (열왕기하 25장)은 바벨론에 의해서 침략당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침공 당시에 성벽을 허물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동쪽 성벽의 한 부분이 아직 남아 있던 것은, 다윗 성의 동쪽 경사면이 기드론 골짜기 쪽으로 30도 이상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분석하였습니다.

이 발굴과정에서 “로제트 스템프(Stampo Rosette)”라고 불리는 점토로 된 인장도 발굴되었습니다. 발굴된 성벽의 유적 근처에서 바빌로니아에서 섬기고 있었던 두 신 “마르둑(Marduk)”과 “나부(Nabu)”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묘사되어 있는 바빌로니아의 돌 인장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Tsafan”이라는 유대인 이름이 새긴 점토로 만든 인장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방어하기 위하여 돌로 된 성벽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성벽과는 상관이 없는 이스라엘 성의 성벽입니다.

1542년에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대제에 의하여 완성된 예루살렘 성벽에는 “다윗 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토만 터키의 황제 Suleiman은 다윗의 도시를 성안에 포함시키기를 원하였는데 그 건축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건축가는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속설에 의하면, 또 다른 이유로써 이 두 건축설계가가 설계한 예루살렘 성의 깊은 비밀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Sultan Suleiman은 그와 같은 이유로 그들의 목을 베었던 것이라는 말이 돌았었다고 합니다.

자파 문(Jaffa Gate)이 있는 성벽 근처에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데 책임을 맡고 있었던 2명의 건축가의 무덤들이 있습니다. 그 돌무덤들은 AD 1541년 예루살렘 성벽을 쌓을 때 시온 산성과 다윗 성을 예루살렘 성안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하여 참수형(decapitation)을 당하였던 건축가의 무덤입니다.

Orange Line으로 된 성벽은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에 의해서 쌓여진 성벽.

원래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구 예루살렘(Old City)의 면적은 약 1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면적은 오늘날 예루살렘 시의 면적은 126 km² 이므로 전체 면적의 1%도 채 되지 않는 크기입니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구약시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했던 역사적인 예루살렘으로 그 후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졌던 역사의 무대인 것입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예루살렘 성벽의 북쪽 성벽이 가장 먼저 완성되었고 뒤이어 동쪽과 서쪽 벽, 그리고 남쪽 벽이 쌓아졌습니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4,018 m이며, 성벽을 따라 사방으로 8개의 성문이 있으며, 성(城)위에는 34개의 탑이 설치되어 있고 24개의 망루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성 안에서 화살 등을 쉽게 쏠 수 있도록 폭은 매우 좁고 위아래로 긴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성을 향하여 쳐들어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뜨거운 기름을 붓거나 무거운 돌을 굴려서 방어할 수 있도록 “Machicolations(돌출총안)”도 설치하여 놓았습니다.

 

성벽의 여러 가지 Machicolation(돌출총안)들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구 예루살렘(Old City)의 성벽에는 모두 8개의 문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욥바 문(Jaffa Gate), 다메섹 문(Damascus Gate), 헤롯 문(Herod Gate), 스테반 문(Stefan Gate), 분문(Dung Gate), 그리고 시온 문(Zion Gate)은 적들이 공격을 하여 올 때에 침입하였을 때에 방어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ㄷ” 자 또는 “ㄴ”의 모양으로 설계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인 설계방식은 원래의 성벽에 있었던 성문의 형태에서 본 따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 교통의 편리를 위해서 스테반 문(Stefan Gate)과 분문(Dung Gate)은 수레들이나 차량들이 곧바로 지나갈 수 있도록 변형되었지만 아직도 4개의 문은 “L”자형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황금 문 (Golden Gate, 미문(美門), 자비의 문과 회개의 문)

예루살렘 성벽의 동쪽 방향으로는 키드론 골짜기가 있고 그 위로 올리브 산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의 동쪽에는 황금의 문(Golden Gate)과 라이온 문(Lion Gate)이 있는데, 그중에서 황금의 문(Golden Gate)에는 유대인의 메시아가 올 때에는 예루살렘 성의 황금의 문을 통하여 들어 올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 무슬림들은 유대인의 메시아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쇄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문 앞에는 무슬림들의 무덤들을 묻거나 놓는 방법으로 막아 놓아서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황금의 문을 통하여서 아무도 들어 올 수도 나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황금 문 앞에 아랍 무슬림들의 무덤들이 많이 있는 이유는 유대인의 관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유대교도들은 무덤을 만지거나 그것을 스쳐지나가더라도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전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던 매우 엄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이곳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황금 문 앞에 무덤들을 만들어 놓으면 그곳을 지나가서 황금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황금 문을 통해서는 메시아가 들어 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황금 문 앞에 수많은 무덤들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황금 문(Golden Gate, 미문, 자비의 문과 회개의 문)                    황금 문의 안쪽에서 본 모습

또 한편 이슬람교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이 황금 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으로부터 죽었던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황금 문과 가까이 묻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금 문은 아랍 사람들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의 문(Gate of Eternal Life)”으로 불리기도하며, 현재 황금 문이 있는 근처는 물론, 건너편의 감람산 기슭까지 수많은 유대인과 무슬림들의 묘지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람산(올리브 산)과 키드론 골짜기를 마주보고 있는 황금 문은 “황금의 돔”에서 동쪽의 성벽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황금 문(Golden Gate)”이라는 명칭 이외에도 “미문(美門)”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렇게 불렸던 것은 예루살렘의 성문들 중에서 이 성문이 가장 아름답게 꾸며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가 하면 또 성문의 위치가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 성문은 “동문(Eastern Gate)”으로 불렸습니다.

이 동쪽의 문이 왜 “황금 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사도행전 3장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원래에는 “Beautiful Gate(미문)”이라고 불리는 문이었는데 AD 4 세기경 Vulgate 성경을 번역한 Jerome이 “Beautiful”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Oraia”를 기록하여야 하는데 그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였던 “Aurea(Golden)”라고 기록함으로써 “Beautiful”이 아닌 “Golden”으로 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 황금 문은 성문들 중에 가장 오래 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가장 밑 부분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반석은 BC 6 세기에 재건되어진 제 2 성전 때의 것으로 느헤미야 시대의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황금 문”은 AD 520년경에 로마 황제 Justinian I세가 통치할 때 세워졌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 되고 말았는데, 그 후 AD 7세기경 아랍의 우마이야 왕조가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 산에 “바위의 돔”을 건설하였을 때, 이 “동쪽의 문”도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 Golden Gate은 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예루살렘 성벽을 1541년에 새롭게 축성할 때, 건축하지 않고 원래 있었던 성문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술탄(왕) 술레이만 1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올 것이라는 전설에 의하여 메시아가 들어올 수 없도록 성문의 두 입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동쪽 문(황금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후, 문이 닫혀 다시는 열리지 않으며, 메시아가 올 때에야 비로소 문이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에스겔 44:1~3)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성소 바깥 동쪽 문으로 데려갔는데, 그 문은 닫혀 있었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 문은 닫아 놓아야 하며 열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문은 닫아 두어야 한다. 오직 왕만 문 안에 앉아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왕은 현관문으로 들어오고 반드시 그리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올리브 산 넘어에 있던 벧바게(Beth Page)로부터 새끼 나귀를 타고 이 문(동쪽의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또 유대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Divine Presence)”가 이 문을 통하여 자주 임하였다고 하며, 또한 이 문은 에스겔서 44장에 기록된 것처럼 메시아가 들어오게 될 것이고 나가게 될 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려주일을 지키면서 메시아(그리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고 있고 유대인들도 마지막 날에 이곳을 통하여 메시아가 들어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스가랴 14:3~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아가셔서 그 나라들과 싸우실 것이다. 전쟁 때에 싸우듯 싸우실 것이다. 그 날에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 산 위에 서실 것이다. 그러면 올리브 산은 둘로 갈라져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질 것이다. 너희는 아셀까지 뻗어 있는 이 산 골짜기를 통해 도망할 것이다. 마치 유다 왕 웃시야 시대에 지진을 피해 도망한 것처럼 도망할 것이다.  그 때에 내 주 하나님께서 모든 거룩한 사람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이 황금 문은 “자비의 문(gate of Mercy)”과 “후회의 문Gate of Repentance)”, 이렇게 2 개의 문이 있는데 심판의 날이 되면, 선한 사람은 “자비의 문”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악한 사람은 북쪽의 문인 “후회의 문”을 통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전승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는 그날에 이 “회개의 문”에서부터 2 개의 다리가 건너편에 있는 올리브 산으로 연결될 터인데, 하나는 철로 만들어진 다리가 연결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이로 된 다리가 연결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철로 된 다리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은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랍사람들은 이 “회개의 문”을 “영생의 문”라고도 부릅니다.

1898년에 촬영된 황금 문의 정면                                  1898년에 촬영된 황금의 문, 후면

사자 문(Lion gate, 스데반 문, 양 문, 여호사밧 문)

성문에 사자(Lion)가 부조되어 있어서 “사자 문(Lion Gate)라고 불리는 이 성문은 감람산(올리브 산)을 마주보며, 예루살렘 성벽의 동쪽 성벽에 있으며, 이곳을 통하여 Muslim Quater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번제 제사의 희생 제물로 양을 끌고 들어갔었던 문이라고 하여 “양의 문(Sheep Gate)”이라고도 불렀으며 (사도행전 7:54~60)에 기록된 사건인 초대교회의 스테반 집사가 순교 사건이 있었던 곳이 이 성문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기독교도들은 이 문은 “스테반 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Lion Gate를 나와서 남쪽 키드론 골짜기에 이르게 되면 그곳에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스데반 교회”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이 성문을 통하여 “여호사밧 계곡”으로 갈 수 있다고 하여 “여호사밧 문”이라고 하고, “마리아의 무덤”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전승에 의하여 “마리아 성문”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7:54~60) “공의회 의원들은 스데반이 하는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나서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모두가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그를 향하여 돌을 던졌습니다. 증인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이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습니다.”

1860년에 촬영된 Lion Gate                                                            사자 문의 지금 모습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던 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예루살렘 성벽을 개축하고 있던 어느 날, 술레이만 대제의 꿈에 4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서 대제를 삼켜버리려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을 해몽한 사람에 의하면, 사자들이라면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 예루살렘 성을 다시 유대인에 의해서 정복당하게 될 것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이러한 꿈의 해몽을 듣게 된 술레이만 대제는 그 사자들이 나타났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성문을 세우고 성문의 벽에 꿈에 나타났던 4 마리의 사자들을 성문의 양쪽에 한 쌍씩 조각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승의 이야기에 의하면, Ottoman(Osman Turkey)의 무슬림이 서방으로부터 왔던 십자군들과 동방으로부터 왔던 몽고의 침입을 막아낸 유명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자(Lion)”로 알려진 Mamluke의 술탄 Baibars(1223~1277년)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의 상징이었던 사자를 성문의 벽에 새겨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문의 벽에 새겨 넣은 동물은 일반적으로 그 동물이 사자(Lion)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Leopards”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번제 제물로 사용될 양(흠이 없고 어린 양)들이 이 문을 통하여 들어 왔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이 문은 “양 문(Sheep Gate, 느헤미야 3:1)”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승에 의하여 지금도 매주 금요일이 되면 이 성문 근처에서 양(羊)을 팔고 사는 시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Lion 성문의 Lion 부조                  왼쪽에 새겨진 사자 부조(위)와 오른쪽에 새겨진 사자 부조(아래)

 

1819년에 그려진 Lion Gate의 모습                                   1857년에 촬영된 사자 문의 모습

이 문(Lion Gate)을 통하여 감람산(올리브 산), 베다니를 지나, 요단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여리고를 지나 요단강으로 내려 갈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부터 “사자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Old City)으로 들어가면 Muslim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바로 우측에 “성 안나 교회”가 나타납니다. 이 교회당의 뒤쪽에는 요한복음은 5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 중의 하나인 38년 동안 걸어 본 적이 없는 환자를 일으키셨던 사건의 현장인 베데스다 연못(Bethesda Pool)의 유적이 있습니다. 하은 성지 순례 Team은 Lion Gate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Old City)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성 안나 교회와 베데스다 연못”을 방문하였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오스만 터키로부터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통치권을 인수받은 후에 이 Lion Gate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 왔으며, 1920년 영국군의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입구를 조금 더 넓게 확장하였습니다. 1967년의 “6일 전쟁” 때 아랍 연합군과 대항하여 싸워서 이긴 이스라엘군대는 이 사자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왔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제 1차 대전 후, Lion Gate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영국군.             1967년 6월 통곡의 벽 앞에서 이스라엘 군인들

통곡의 벽 앞에서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이스라엘 공수단원                올리브 산에서 성전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 병사들

1967년의 6일 전쟁 때에는 이스라엘 군대의 낙하산 부대가 “Lion Gate”의 성문을 열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서 성전 산에서 아랍의 통치자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예루살렘 주민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항복 문서를 받아 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은 “통곡의 벽(Western Wall)”로 가서 성벽에 Kiss를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Rabbi Shlomo Goren이 Torah 두루마리를 들고 도착하여 Shofar(뿔 나팔)를 불고 6일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위한 기도와 성전 산의 수복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Jerusalem of Gold”의 노래를 부르면서 이스라엘의 국기를 게양하였습니다.

Lion Gate를 들어서면 보이게 되는 Muslim Quater의 Str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