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파(욥바) (Jaffa Gate, 다윗의 문, 아브라함의 문, 헤브론 문)

“자파 문(Jaffa Gate)”은 예루살렘 성문 중에서 서쪽 성벽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성문입니다. “자파 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지중해 연안에 있었던 욥바(Jaffa) 항구로 이어지는 고대 교역로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이 성문은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서 다시 세워진 성문입니다.

“자파 문”은 아랍어로는 “밥 알-칼릴(Bab al-Khalil, 또는 헤브론 문)”로 불리기도 하는데, “엘 카릴(al-Khalil)”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라고 하면 성서에서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 성문은 “아브라함의 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910년에 촬영된 세관의 시계탑이 있었던 자파 문          1890년대에 촬영된 자파 문의 모습

“자파 문”은 1538년에 세워진 “오스만 문”과 남쪽 성벽에 있었던 모든 성문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 성문에는 중세 시대에 건축된 성문들의 모양처럼 Gate Tower가 이곳에 서 있었습니다.

Jaffa Gate의 북쪽과 남쪽의 양쪽 끝에 Gate Tower가 있는 “L” 자형 입구가 있습니다.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에 이 성문은 그 옆에 다윗 망대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 문”이라고도 불려 졌던 성문이었습니다. 성문의 정면에는 “찬양 알라, 그리고 그의 하인, 이브라힘” 이라는 글귀가 아랍어로 쓰여 있습니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우리 주 위대한 술탄, 터키와 아랍, 페르시아의 왕, 술레이만 벤 살림 칸은 이 축복받은 성벽을 건설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알라께서 그의 통치를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Arabic Inscription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 Old Jerusalem은 이스라엘 국가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이스라엘은 Old City의 성벽과 성문들을 광범위하게 보존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Jaffa Gate에 쓰여 있었던 Osman Turk식 비문 아래에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된 비문이추가되었는데, “5730년 테벳월 10일(=1970년), 성벽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 성벽 수리와 사마리아인과 아랍인을 어떻게 화나게 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느헤미야서 4장)에서 발췌한 짧은 인용문이 “예루살렘성이 보수됨(느헤미야 4:7)”라고 추가되었습니다.

Jaffa gate 1898~1916의 모습 (Inside and Outside)

1898년까지는 욥바 문과 다윗 망대 사이에는 성벽이 있었으나 독일의 황제 Wilhelm 2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벽을 헐어내어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처럼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넓은 길이 그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1917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영국의 Edmund Allenby 장군이 영국 군대의 선두에 서서 이 욥바 문을 통하여 들어 왔는데 그 때 예루살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Allenby 장군은 말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왔습니다.

자파 문을 들어서게 되면 오른쪽은 아르메니아 지구이며, 왼쪽은 기독교 지구입니다. 성문 안으로 들어오면 오른쪽에는 다윗의 탑이 있고 정면에는 Christian Information Center가 있으며, 왼쪽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Information Center가 있습니다.

말에서 내려 걸어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알렌비 장군            철수하고 있는 오스만 터키 군대

자파 문의 바로 오른쪽 옆에는 예루살렘 성의 안전을 위한 요새가 있었는데 그곳에 “다윗 망대(Tower of David)”라고 불렸던 요새의 탑이 서 있습니다. 이 망대는 기원전 20년 헤롯 대왕이 예루살렘 서쪽 방어를 위해 지은 요새의 망대입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점령되고 성전도 파괴될 때, 이 지점이 로마군의 공격 거점이었으며, AD 11세기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공략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다윗의 망대는 오스만 터키 술탄 술레이만 대제 때 재건된 것입니다. 현재 탑 내부에는 고고학 박물관과 전망대가 있습니다.

1900년에 오스만 터키의 술탄 압둘 하미드 II세가 자신의 예루살렘 통치 25 주년을 기념하면서 시계탑을 건설하려 하였지만 도시의 빈곤으로 인하여 20,000 프랑의 높은 비용을 조달하지 못하여서 중단되었다가 1907년에 Jaffa 성문 지붕에 시계를 설치하기 시작하여 1908년에서야 비로소 매우 화려한 시계탑이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의 Jaffa Gate에 시계탑이 건설되기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다마스커스 문보다 그 당시에는 Jaffa Gate가 더 중요했음을 보여줍니다.

시계탑은 인근에 있었던 Zedekiah’s 동굴에서 채석한 석회암으로 지어졌습니다. 높이는 13피트였고, 주요 방위를 향해 4개의 시계 면이 있었습니다. 동쪽과 서쪽 면은 공식 시간(유럽 시간)을 표시했고, 북쪽과 남쪽 면은 현지의 시간을 표시했습니다. 시계 면 위에는 종과 오스만 통치의 상징인 초승달과 별이 있었습니다. 1908년에 “자파 문”의 바로 오른쪽에 세워졌었던 Ottoman 시계탑을 중심으로 하여 이곳에 상업지구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시계탑의 맨 꼭대기에 4면에 시계를 설치하였는데, 동쪽 면과 서쪽 면의 시계는 유럽의 시간에 맞추어져 있었고, 북쪽 면과 남쪽 면의 시계는 현지의 시간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시계탑 맨 위에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상징하는 종과 초승달과 별의 모양이 있었습니다. Ottoman의 시계탑은 10년 동안 그곳에 서 있었으며, 영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인 1922년에 미적(美的)인 이유로 인하여 철거되고 말았습니다.영국은 16 세기의 성벽과 성문의 역사적 측면을 복원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으나 미학적으로 외관을 훼손한 것으로 간주되어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성벽과 성문을 향하여 세워졌던 최근의 여러 건물들도 철거되었습니다. 영국 행정당국은 1944년에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벽을 따라 세워져 있었던 건물을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자파 문”은 1948년 제 1차 중동전쟁 당시 요르단의 영토에 속해 있으며, 자파 문 옆에 방어벽이 세워져 있어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지만, 1967년 제 3차 중동전쟁 이후 전쟁에서 승리를 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전 지역을 점령한 후에 이스라엘에 귀속되고 나서는 성문의 출입이 자유로워지게 되었습니다. 자파 문은 1981년부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파 문 아래로는 대형지하주차장과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관광객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자파 문 안쪽의 오른편에는 관광안내소가 있고, 신시가지와 연결되는 자파 문의 바깥쪽으로는 큰 상권인 Mamilla Shopping Center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1944년 당시 영국군이 역사적인 도시 성벽을 가린다는 이유로 부근의 건축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1910년경

시온 문(Zion Gate, 예언자 다윗의 문)

“시온 문(Zion Gate)”은 예루살렘의 구시가지(Old City)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8개의 문들 중에서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서, 유대인 지구로 통하는 성문입니다. 1541년 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에 의해서 건립하였습니다. 이 성문은 시온 산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시온 문(Zion Gate)”이라 부르는 문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사아르 시온(Shaar Zion)”이라고 하는데 시온 산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으로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아랍사람들은 시온 산에 있는 예언자 다윗 왕의 무덤으로 통한다는 뜻으로 “예언자 다윗 문(Bab el-Daoud)” 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1968년 6일 전쟁 이후 보수하였지만, 시온 문의 벽면과 기둥에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써 지금도 무수한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2008년에 새롭게 보수작업을 마쳤습니다.

1898년에 촬영된 시온 문                                               성안에서 보이는 시온 문의 모습

1948년 독립 전쟁과 1967년 6일 전쟁 후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들

시온 문 안쪽은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관리하는 아르메니안 지구로서 비잔틴시대의 중앙대로인 Cardo와 중세 시대에 건축된 회당 등이 있습니다. 부근에는 “다윗 왕의 가묘”와 “마가의 다락방”, “가야바의 집”, “마리아 영면교회(Dormition Church)” 등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수많은 유적들이 있습니다. 이 시온 문은 다마스쿠스 문, 자파문과 함께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문이기도 하며,적들이 침범하여 왔을 때 방어하기 좋도록 “ㄴ”자형으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2008년 수리를 마친 Zion Gate

분문(Dung Gate, 오물 문)

Dung Gate는 1538-40년에 만들어진 문으로써 “Silwan Gate”, 또는 “Mograbi Gate”라고도 불리는 성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문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며 유일하게 “유대 지구”로 통하는 성문입니다. 분 문(오물 문)은 예루살렘 옛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의 출입구 중 하나로, 예루살렘 성전 산의 남동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Dung Gate는 오늘날의 Dung Gate보다 남쪽에 있었으며,  도시의 쓰레기를 보내는 역할을 하였던 문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이 문은 보행자를 위한 성벽의 작은 틈일 뿐이었는데, 성벽 바깥쪽으로  문루(Gate-house)가 지어졌습니다. 1938년에 영국군이 문루(Gate-house)를 철거하였습니다. 1952년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장식용 아치 아래에 철근 콘크리트 Girder(기둥과 기둥 사이를 잇는 수평 빔(Beam))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자동차와 버스가 통행하기 쉽도록 문의 크기를 늘렸습니다.

고대에는 성 안의 분뇨와 번제 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생겨난 쓰레기를 기드론 골짜기로 내버리기 위해 만들었던 문이었기 때문에 “분문(糞門, 오물 문)”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시대에는 이 성문의 주변에는 가죽을 가공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면서 이곳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출입했다고 하여 “무두질 꾼의 문” 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39장)에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을 때 느브갓네살의 군대를 피하여 시드기야 왕이 도망갔을 때 이 문을 통하여 도망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성문이 “분문(糞門)”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9:4~7)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모든 군인들은 그들을 보고 달아났습니다. 시드기야와 그의 군인들은 밤에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와 왕의 정원 길을 지나서 두 성벽 사이의 문(두 담 샛문)을 통해 아라바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가 그들을 뒤 쫓아와서 여리고 평야에서 시드기야 왕을 붙잡아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에게 끌고 갔습니다. 바빌로니아 왕은 시드기야를 심문했습니다. 립나에서 바빌로니아 왕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귀족들도 다 죽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시드기야의 눈을 빼고 그를 쇠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곳에서부터 실로암 연못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기 때문에 “실로암 문”이라고도 불렸던 곳입니다. 성문의 안쪽에는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이 남아있습니다.

(느헤미야서 3:13~14) “하눈과 사노아 사람들이 ‘골짜기 문’을 보수했습니다. 그들은 문을 세우고 문짝과 자물쇠와 빗장을 달았습니다. 그들은 또 ‘거름 문(Sha’ar Ha’ashpot)’까지 성벽 1,000 규빗을 보수했습니다. ‘거름 문(Sha’ar Ha’ashpot)’은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보수했습니다. 그는 벧학게렘 지역을 다스리던 사람입니다. 그는 문을 세우고 문짝과 자물쇠와 빗장을 달았습니다.”

히브리어로 “거름 문(분문)”을 “샤아르 하쉬폿(Sha’ar Ha’ashpot)”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오늘날 분문(거름 문) 안쪽의 통곡의 벽과 지리적으로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물 문(거름 문)” 맞은편에는 다윗 왕이 처음에 예루살렘에 정착했을 때 세웠던 다윗성이 있습니다. “오물 문”을 지나서 계속해서 곧장 내려가면 “실로암 연못”에 이르게 됩니다.

1948년 이전까지의 이 문은 작고 좁은 문이었지만, 1948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던 이스라엘에 의해서  Jaffa 문이 봉쇄된 후에 자동차들이 이 문을 통하여 들어 올 수 있도록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던 요르단 사람들이 확장공사를 하여 더 넓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을 통해 서쪽 벽(Western Wall)과 유대인 지역(Jewish Quarter)으로 갈 수 있어서 유대인들과 관광객이 많이 이용하는 성문입니다. 분문을 지나는 사람들은 통곡의 벽을 방문하는 유대인이나 그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00년대 초기에 촬영된 모습                     1940년대에 촬영된 “오물 문”

오물 성문 맞은편에는 다윗이 초기 예루살렘에 정착했을 때의 다윗성의 유적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지금도 수많은 유적들이 이곳의 주변에서 발굴되고 있습니다. 분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 편에 예루살렘 성전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이 분문(Dung Gate)의 보수작업을 하였는데 건축가 아론슨(Shlomo Aronson)에 의해 개축되었으며, 현재는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보수되고 있는 Dung Gate                                        Dung Gate

성문 안에서 보이는 Dung Gate

성벽 순례 (Ramparts walk)

전체 약 3.4 Km에 달하는 예루살렘 성벽을 따라서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성벽 위를 걸어 갈 수 있도록 길을 Ramparts walk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 바퀴 도는 데 약 1 시간가량 걸립니다. 욥바(Jaffa) 문 안쪽에 있는 Information Center 옆에 성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입구가 있습니다.

시간 : 토요일~목요일 09:00~16:00, 금요일 09:00~14:00    입장료 : 20 세겔 (학생과 Senior : 10 세겔)

다윗의 망대 (Tower of David)

예루살렘 옛 시가지 “자파 문(Jaffa Gate)”의 남쪽 성벽 안에 있는 이 망대는 유대인들이 BC 2세기경에 성전 산을 경비하기 위하여 이곳에 처음으로 망대를 세우고 “다윗의 망대(Tower of David)”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에 십자군, 아랍, 맘룩(Mamlukes), 오스만 터키 제국 등 예루살렘을 통치하였던 여러 세력들이 이곳을 군사적 요새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AD 135년 제 2차 유대인 폭동을 진압한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의 유대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예루살렘 성의 이름을 로마의 도시 “Aelia Capitolina”로 바꾸어 버렸을 때,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이곳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십자군에 의해서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에 다시 “다윗의 망대”가 세워졌습니다.

이곳에 있는 다윗의 탑(Tower of David) 박물관은 1983년에 다윗의 탑 예루살렘 시립 박물관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Old City 아르메니아 구역에 있는 Jaffa Gate 바로 너머에 있는 다윗의 탑으로 알려진 2,500년 된 성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전시물과 고고학적 유적을 통해 4,000년의 이 도시에 흔적을 남긴 수많은 사람들과 도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도시를 방문하는 거의 모든 관광객이 들르는 곳이고, 공공 행사를 위한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재단은 1977년에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고고학적 발굴을 포함하여 박물관의 물리적 개발을 지원하여 Elias Sourasky 고고학 정원을 조성하고, 중세 홀과 Phasael 타워의 전망대를 복원하고, 박물관 입구 근처에 Nissim Dwek 정원을 조성하고, Nehama & Menache Mani 허브 정원을 안뜰에 조성하였습니다.

2002년에 이 재단의 지원으로 하여 기원전 23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헤롯 대왕의 궁전 터가 발굴되었습니다. 1837년에 구시가지 성벽에 지어진 터키 감옥이자 막사가 있었던 곳을 발굴을 하는 과정에서 헤롯 대왕의 궁전 터가 발견되었으며, 박물관은 이곳을 교육 센터로 전환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재단은 다윗의 탑 박물관에서 많은 전시를 개발하고 설치하는 것을 지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 모마쥬(Homage)를 전시하고 Sound & Light Show, 1999년에 미국의 예술가 Dale Chihuly가 만든 유리 작품으로 구성된 예루살렘에 대한 헌사 전시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전시는 박물관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전시 중 하나였습니다. Chihuly는 시애틀에 있는 그의 작업실의 Staff들 30명과 지역 근로자 및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팀과 함께 10,000개가 넘는 조각들과 42톤의 유리로 만든 장난기 어린 작품들을 박물관의 고고학적 유적지와 극적인 공간 전체에 설치하였던 작품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4,000년 예루살렘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정리하여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습니다. 입구의 영상 실에서 동영상을 통하여 설명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가나안 시대부터 제 1 성전시대, 제 2 성전시대, 로마 통치시대, 비잔틴 시대, 십자군 시대, Mameluk 시대, 오스만 터키 시대, 영국의 통치 시대, 현대의 이스라엘 국가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별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전시장의 옥상에 마련되어 있는 전망대를 통하여 고색 찬란한 옛 예루살렘과 신시가지의 Sky-line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가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수시로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토요일의 겨울밤이 되면 PM 7:00 부터 “Jerusalem Light the Night”이라는 레이저 빔 Light Show가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전투하는 모습, 다윗 왕이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 로마 군사들과 오스만 터키의 군사들이 전쟁을 하면서 뛰어 다니는 생생한 장면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던 성전 다윗의 망대를 11세기에 십자군이 다시 건축하였는데, 이 망대를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 성의 성벽을 새롭게 재건할 때, 많은 부분을 새롭게 손질하였습니다. 원래 다윗의 망대 자리는 헤롯 대왕이 그의 동생을 위하여 탑을 쌓아 건축하였던 자리였는데, 이 망대에 “다윗의 망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다윗의 시대에 세워진 망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군사적, 행정적인 중심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붙여진 상징적인 이름이었습니다. “다윗의 망대”는 예루살렘 구시가지(Old City)의 자파 문(Jaffa Gate) 옆 성벽에 위치한 요새와 망루를 가리킵니다. 아랍어로는 부르즈 다우드(Burj Daud, 다윗의 망대)라고 부릅니다.

1839년에 그려진 다윗의 망대의 모습                              1870년에 촬영된 다윗의 망대

다윗의 망대는 예루살렘의 방어를 위해 가장 전략적인 장소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고학적 유물의 연대는 BC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새와 망루가 본격적으로 세워진 것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에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오늘날 서쪽의 언덕으로 불리는 지역까지 확대되었으며, 여기에는 오늘날의 아르메니안 지구와 시온 산(Mount Zion)이 있는 유대 지구가 포함됩니다.

1900’s Tower of David과 현재의 Tower of David

그 후 남 유다의 히스기야(Hezekiah) 왕이 773 m에 달하는 북서쪽 언덕 위의 성벽을 경계로 하여 최초의 요새를 쌓았으며, 하스모니안 왕조(Hasmonean dynasty, BC 140-37) 시기에는 요새의 가장자리에 망대 여러 개를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 37-100)의 기록에도 나타나있습니다. 하스모니안 왕조를 멸망시킨 헤롯(Herod, BC 73-BC 4 재위) 대왕은 BC 37년부터 약 3년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방어 및 시온 산기슭에 위치한 왕궁 보호를 위해서 세 개의 거대한 망대를 이 요새의 성벽에 건설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약 44 m에 달하는 가장 높은 망대를 자신의 형의 이름을 따서 “파사엘(Phasael)”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다른 망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을 따서 “미리암(Miriam)”이라고 불렀으며, 그녀가 죽은 뒤에는 망대의 서쪽에 매장하였습니다. 세 번째 망대는 헤롯 대왕의 친구의 이름을 따서 “히피쿠스(Hippicus)”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 망대 중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가장 높았던 “파사엘 망대”뿐입니다.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다윗의 요새는 로마 군대의 군사 병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였던 AD 4 세기 이후부터는 수도사 공동체가 이곳 망대가 있는 곳에 기거하였습니다.

AD 638년에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무슬림 지도자들이 다윗의 망대를 보수했으며, 이 다윗의 망대의 구조가 매우 견고해서 1098년에 십자군 공격이 있었을 때에 이슬람의 군대들은 그들을 막아내는데 매우 유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을 통치하였던 기간 동안에 십자군은 다윗의 요새 외벽에 해자를 만들었고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자파 문을 통과하는 순례객과 대상(상인들)들을 통제하였습니다.

1187년에 살라흐 앗딘(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다윗 망대를 점령하였습니다. 그 후 1260년에 맘룩(Mameluk)에 의해 망대가 파괴되었으나 오스만터키 제국이 1537년부터 1541년에 걸쳐 이곳을 재건하였습니다. 이곳 요새가 재건된 후, 약 400년 동안 이곳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병영으로 사용되었으며, 당시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과 첨탑이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오스만터키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영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국 행정당국은 예루살렘의 역사적 유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다윗의 망대를 보수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다윗 망대 내에 팔레스타인 민속박물관이 개관되었습니다. 1948년 제 1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윗 망대를 군사적인 용도로 활용했으나, 1967년에 제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면서 다시 문화적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명소로서, 내부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을 함께 들러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전망대에서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전경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