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통곡의 벽(Western Wall, Wailing Wall)
통곡의 벽(Western Wall, Wailing Wall)
“서쪽 벽(통곡의 벽)”은 B.C. 538년에 선포된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대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온 스룹바벨은 다시 성전을 개축하였습니다. 그 후 BC 20년경에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개축하면서 증축하였는데 이때에 세워졌었던 건축물의 일부였습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로부터 파견된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헤롯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다행스럽게도 성전의 서쪽 벽 끝부분은 조금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 당시 티투스 장군이 이렇게 서쪽에 있는 벽을 조금 남겨 두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정복한 도시에 이렇게 커다란 성전을 부수었다고 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이 서쪽 성벽은 원래의 남아 있던 성벽 위에 계속해서 새로운 성을 쌓았기 때문에 통곡의 벽의 밑 부분으로부터 올라가면서 돌로 된 벽돌의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밑 부분부터 7단까지는 제 2 성전(헤롯 성전) 즉, 헤롯 대왕이 성전을 개축할 때 쌓았던 성전의 벽이고, 그 위의 4 단은 AD 7세기에 첫 번째 이슬람 국가였던 우마야드(Umayyads) 왕조에 의해서 쌓아 올려진 것이며, 그 위에 비교적 작은 돌 벽돌로 쌓아 올려진 14단의 돌 벽돌은 오스만 터키 시대에 쌓아 올려진 것들입니다.
현재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벽의 모습은 길이 50 m, 높이 18 m가량 되지만, 실제로는 땅속으로 훨씬 더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현재의 서쪽 벽(western wall)은 지하로 17단이 묻혀있습니다. 아직도 묻혀 있는 성벽의 일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윌슨 아치(Wilson Arch)”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서 서쪽 벽 터널로 들어가게 되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쪽 벽이 땅 속에 묻혀있는 이유는 성전 산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성전의 마당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서 산기슭으로부터 산꼭대기를 향하여 돌로 그 기초를 쌓아 올린 후에 평평하게 땅을 고르기 위해 공간들을 메워가면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제 2 성전이 파괴된 후, 약 250년 동안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잔틴 시대(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가 되어서야 일 년에 단 하루, “성전이 파괴된 날(아브 월 9일째 날, 2024년 8월 5일)” 그 날 하루에만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나라를 잃어버리고 로마 제국의 방방곡곡으로 흩어진 후,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날(성전이 무너졌던 그 날) 이곳(성전의 벽 중에서 조금 남아 있었던 서쪽 벽)에 모여서 성벽을 두드리면서 통곡하여 슬피 울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이 “서쪽 성벽(Western Wall)”을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이 옛 가나안 땅을 회복하고 독립을 선언 한 후에도 1948년부터 1967년까지는 이곳이 요르단의 통치 구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들어 갈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 그곳이 이스라엘 영토가 된 후에야 유대인들이 다시이곳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제 1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건축하여 기원전 957년에 완공한 성전입니다. 제 1 성전은 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하였던 예루살렘의 제 1성전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이곳의 번제 단에서는 수많은 제물들이 피흘려 죽고 불 태워졌습니다.
언약궤가 놓여 있었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Shekhina)”가 있었던 자리로 여겨졌고, 이곳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Yom Kippur (속죄일)”라고 불리는 그날 하루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죽고 나서 통일왕국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이렇게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 예루살렘 제 1성전은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에 의해서 파괴되었는데 그의 군대는 BC 604년과 BC 597년에 성전의 보물들을 노략해갔습니다. BC 586년 아브(אב) 달 9일(7월 8일~8월 6일 경)에는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도성에서 쫓겨나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및 성전의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 대중들 앞에서 암송되도록 기록되어졌는데,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면서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2:11~12) “내 백성의 수도가 이렇게 망하다니, 울다 지쳐 눈앞에 아득하고 애가 끊어지는 것 같구나. 아이들, 젖먹이들이 성안 길목에서 기절하는 모습을 보니 창자가 터져 땅에 쏟아지는 것 같구나. 먹고 마실 것을 달라고 어미에게 조르다가, 성안 광장에서 부상병처럼맥이 빠져 어미 품에서 숨져갔구나.”
페르시아 아카이메니아 왕조의 창시자이면서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고레스 왕”은 기원전 538년에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그들에 의해서 성전 재건 작업이 시작되어 BC 515년에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미약했던 유대의 귀향민들은 솔로몬이 건축하였던 것처럼 아름답고 화려하게 성전을 장식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름다웠던 예루살렘 성전의 옛 모습을 기억하던 몇몇 노인은 새로 건축된 성전의 모습을 보고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BC 4~3세기)를 지나면서 많은 이민족 군주들은 유대인들의 성전이었던 스룹바벨의 성전에 대하여 대체로 존중하였으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BC 168년 예루살렘의 성전의 제단에서 그들의 신 제우스(Zeus)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모독 사건으로 인하여 하스모니아가의 반란이 촉발되었으며, 이 반란을 주도하였던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eus)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성전이 다시 이교도로부터 회복되어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희생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이교도로부터 회복하여 정화하였던 절기가 성탄절과 비슷한 시기에 지내게 되는 유대인들의 절기, “하누카(Hanukkah)”입니다.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eus)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지만 왕조의 정통성은 취약(다윗 왕의 후손이 아니었고, 사독 가문의 제사장 출신도 아니었음)했을 뿐 아니라, 여러 종파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막강한 신생국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하여 BC 63년에 이스라엘 땅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었을 무렵, 그 당시에 로마의 힘을 등에 업고 에돔 족속 출신의 유대의 왕이 되었던 헤롯 대왕(BC 37~4년)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제 2성전을 재건하고 증축하였습니다. 이 성전 재건 작업은 BC 20년에 시작하여 AD 64년에 완성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화려하게 재건된 헤롯 성전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 중심이 되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종교의식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성서 및 그 외의 민족 문학 자료들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였고, 로마 시대에 유대인 최고법정이었던 산헤드린의 집회소이기도 하였습니다. AD 66년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로마에 저항하는 반란이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의 반란이 심하게 되자 AD 70년 로마의 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침공하였으며 이때에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그날은 히브리 달력으로 아브(7월~8월) 달의 9일째 되는 날로서, 바로 BC 586년에 솔로몬의 성전이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 같은 날이었습니다. 그 후 AD 132년에 또 다시 “별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르 코크바(Bar Kokhba)”의 주도아래 반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에는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반란이 진압 된 후, 마침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지역의 이름을 “Palestin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Aelia Capitolina”이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추방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약 1,900년 동안) 그들의 성지 예루살렘으로 들어 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유대인들은 성전이 무너지던 날인 아브 월(태양력 7~8월) 9일 단 하루 성전의 파괴를 애도한다는 목적으로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이때에 유대인들은 성전 산의 서쪽 벽에 모여서 파괴된 성전을 생각하여 눈물의 통곡(Wailing)을 하며 벽(Wall)을 치면서 울었습니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 성지 중에 성지이며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솔로몬 왕이 세웠던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의 군대에게 파괴당한 후,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BC 515년에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여 와서 성전을 재건하였고, 그 성전이 헤롯 대왕에 의해서 남쪽 벽이 280m, 동쪽 벽이 460m, 북쪽 벽이 315m, 그리고 서쪽 벽이 485m나 되는 거대한 성전이 재건되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쪽 벽은 세 번째로 건설되었던 헤롯 성전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로마의 압제 아래에 있던 유대인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로마로부터 온 장군 Titus의 군대에 의해서 성전 개축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부분이 성전의 서쪽 부분(통곡의 벽)이었습니다.
AD 70년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유적이고 마지막 유적지이기 때문에 비잔틴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곳은 유대인들의 순례지였고 희망의 중심이 되어왔습니다. 오늘날 이 벽은 691년 이슬람교도(Muslim)들이 그들의 기도처로 세운 “Dome of the Rock”과 “al-Aqsa Mosque”를 둘러싸고 있는 벽의 일부입니다.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전 유적지의 신빙성은 전승, 역사, 고고학 등에 의해서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이 민족의 단결 및 성전의 재건과 구원의 상징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습니다. 16세기 중반부터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려왔던 오스만 터키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 순례를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쪽 벽(Western Wall)”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종교적인 최고의 성지이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군인의 삼엄한 소지품 검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통곡의 벽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은 남자들이 기도하는 구역이고, 그리고 남쪽은 여자들이 기도하는 구역입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모든 남자들은 키파(머리를 가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의미)라고 하는 작은 모자로 머리의 정수리를 가려야 하는데, 꼭 키파(Kippah)가 아니더라도 머리를 가릴 수 있는 어떠한 모자라도 허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머리를 가려야 하는 것은 의무 사항이 아니지만 반드시 어깨와 무릎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려야 합니다. 매일 24시간 개방되어 있지만 매주 금요일 오후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때에 사진 촬영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000년경에 다윗 왕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드리려 하였다고 하는 전승이 있었던 Moriah 산 위에 그의 도성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도시로 건설된 후부터 지금까지 약 3,000여 년 동안 침략당하면서 포위되고, 정복당하고, 파괴 되었다가 다시 보수되거나 재건축되기를 40여 차례 반복되어 왔습니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예루살렘을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와 무슬림의 시대로 각각 나눈다면, 유대인들이 이곳을 지배하던 시기가 약 550년, 그리스도교는 약 400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통치했던 기간이 약 1,200년, 그 나머지는 그 외의 세력들이 이곳을 다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BC 1,000년경 다윗은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이곳을 금 600세겔에 사들였고, 또 그 이후에는 이 부근을 모두 점령한 후부터 유대 민족은 오랫동안 그 산상의 도성에서 종교적인 번영과 함께 민족적인 번영을 누렸었습니다.
(왕상 8:30~53) “저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해 기도할 때에 주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면, 이 성전으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제단에서 맹세하면, 주께서는 하늘에서 그 맹세를 들으시고 판단해 주십시오. 죄 있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시고, 올바른 사람에게는 죄가 없음을 밝혀 주십시오.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죄를 지어 적에게 패한 후, 주께 돌아와 주님을 찬양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드리면, 주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그 땅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만약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죄를 지어 주님이 그 벌로 비를 내리지 않으실 때, 그들이 이 곳을 향해 기도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죄에서 돌아서면, 주님은 하늘에서 그들이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의 종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주님의 백성에게 주신 이 땅에 비를 내려 주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을 마치고 (열왕기상 8장 22절)부터 시작된 솔로몬 왕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왕상 9:2~3) “여호와께서 기브온에서 나타나셨던 것처럼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 앞에서 기도한 것과 네가 나에게 구한 것을 들었다. 네가 지은 이 성전을 내가 거룩하게 구별하였으므로, 내가 내 이름을 영원히 거기에 둘 것이다. 내가 그 성전을 보살피며 항상 지킬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이 기도하기 원하는 기도제목을 돌 벽돌의 틈 사이에 끼워놓고 기도하는 장소가 이곳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도 기초훈련을 마치게 되면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성인식(Bar Mitzvah or Bat Mitzvah)을 이곳에서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Bar Mitzvah(남자 성인식)나 Bat Mitzvah(여자 성인식)를 하는 자녀의 아버지는 자녀의 죄로 인해 더 이상 벌을 받지 않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성인식을 올립니다.
Bar Mitzvah (남자 아이의 성인식) Bat Mitzvah (여자 아이의 성인식)
유대교의 Orthodox 공동체에서는 남자아이는 13세에 Bar Mitzvah가 되고, 여자아이는 12세에 Bat Mitzvah가 되지만 대부분의 개혁파, 재건주의, 보수파 공동체에서는 성별에 관계없이 13세에 성인식을 합니다. 유대법(Jewish ritual law)에 따르면 자녀의 나이가 13세 이전까지 부모는 자녀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유대인 아이들이 그 나이에 도달하면, 그들은 b’nai mitzvah가 된다고 말하며, 그 때부터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기 시작합니다. 또 어린이들에게도 유대인의 의식법, 전통, 윤리를 알아야 할 책임이 있으며, 유대인 공동체 생활에서 성인들과 똑같이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수없이 많은 발굴 과정을 통하여 많은 곳이 발굴되고 개방되었으며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150년 전의 “서쪽 벽(Western Wall, Wailing Wall, Kotel)”의 모습이 몹시 궁금하여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사진들을 검색하여 스크랩해 보았습니다.
1880년에 그려진 서쪽 벽(신발을 벗고 들어감) Western Wall에서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들 (1917년)
1870년에 촬영된 서쪽 벽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Western Wall의 유대인들 (1920년대)
1898년에 촬영된 통곡의 벽 1929년에 촬영된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1870년에 촬영된 통곡의 벽
1917년 제 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한 유대인 군인들 1967년 6일 전쟁 이스라엘의 공수특전단.
오스만 터키 시대인 1900~1917년에 촬영된 “서쪽 벽”
1929년에 촬영된 Western Wall 1929년 촬영된 Western W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