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St. Anne Church & Bethesda(성 안나 교회 & 베데스다 연못)
성 안나 교회(Church of the St. Anne,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
이제는 옛 예루살렘(Old City)의 성 안으로 들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은교회 성지 순례 Team은 스테반 문을 통하여 돌이 깔려 있는 길을 따라 Jerusalem 성안으로 들어가 성모 마리아의 탄생 교회라고 알려져 있는 성 안나 교회(St. Anne Church) 앞에 섰습니다.
성 안나 교회(Church of the St. Anne,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 십자군 시대에 건축된 로만 가톨릭 성당)
성전 산에서 동쪽으로 즉, 올리브 동산 쪽으로 나 있는 스데반 문(Lion Gate)을 통하여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의 아랍 지구에 위치한 “성 안나 교회”를 만나게 됩니다. 이 교회당은 기독교 전승에 의하여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요하킴(Joachim)과 안나(Anne)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성모 마리아의 부모를 기념하며 세워진 교회당입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곳에 세워진 기념 교회당입니다.
이 교회는 비잔틴(신성 로마제국) 시대인 AD 400년경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나, AD 614년에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을 당시 파괴 되었습니다. 그 후 수도사 Modestus에 의해서 복원되었으나 101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던 이집트의 파티마조 칼리프 하킴에 의하여 또 다시 파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당 건물은 12세기 초엽에 세워진 교회당으로써 전통적인 로마양식으로 건축되었던 십자군시대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1140년 십자군 시대에 발드윈 1세(Baldwin I)의 부인의 요청에 의해서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교회다 건물이 다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당은 예루살렘의 Old City에서 가장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 온 건축물 중의 하나입니다.
성 안나 교회당의 지하에 있는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당
1140년 후로부터 베네딕트 수녀회에서 이 교회당을 1192년까지 관리하였습니다. 1192년에 이슬람교도인 살라흐 알-딘(Salah ad-Din Yusuf ibn Ayyub,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스리던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그가 이끌었던 무슬림 군대는 십자군이 세웠던 수많은 교회의 건물들을 파괴시켰으나 이슬람의 장군 살라딘(Saladin)은 이 교회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파괴 금지 명령을 내렸던 교회당입니다. 그는 이 건물을 회교도(Muslim) 신학교로 사용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였습니다. 성 안나 교회당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세웠던 교회 중에서 몇 안 되게 남아 있는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Church of the St. Anne의 출입문 위쪽을 보면 아랍어로 써진 현판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것은 이 교회당 건물을 무슬림들이 소유했었다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1853년 10월~1856년 2월까지 약 3년 동안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하였었는데 그 전쟁이 “크림 전쟁(Crimean War)”입니다. 이 전쟁은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안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 되어 일어났던 전쟁이었습니다. 또 다른 전쟁의 요인 중의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성지(특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러시아 정교회와 가톨릭의 권한을 놓고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종교적 분쟁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됐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끝난 후, 1856년 오스만터키 제국이 크림전쟁(Guerre de Crimée) 당시, 프랑스가 그들에게 도와 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성 안나 교회 건물과 부지를 프랑스에 양도하였습니다. 그때 프랑스 정부는 그때부터 “빠드레 비안키(Padre Bianchi)수도회”에게 이 교회당의 관리를 요청하여 지금까지 그 수도회가 교회당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 안네 교회(Church of the St. Anne)로 수리되어 복원 되었습니다.
고대 베데스다 연못의 유적 베데스다 연못의 위치
1860년대 예루살렘의 성 안나 교회를 오스만 터키로부터 양도받은 프랑스의 “Padre Bianchi 수도회”의 신부들은 성 안나 교회 근처의 유적들을 고대 기록들을 근거로 하여 부분적으로 발굴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곳이 양문(Sheep Gate) 옆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는 요한복음서 5장에 언급되었던 연못이었던 “베데스다(Bethesda)”라고 여겼습니다. 이 연못 가까이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 제사용 동물을 도살하는데 필요하였던 많은 물이 담겨 있는 커다란 저수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57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발굴을 통해서 길이 52m, 폭 40m 규모의 북쪽 저수지와 길이 57m, 폭 48m 규모의 남쪽 저수지를 발굴하였습니다. 1952년 쿰란의 제 3동굴에서 발견된 구리판에 기록된 한 두루마리 문서도 예루살렘의 “양의 못”이 두 개의 저수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2)의 기록에 의하면 “베데스다 Pool”에는 다섯 개의 행각, 즉 스토아(Stoa)가 있었습니다. 스토아는 그리스 건축에서 기둥으로 이루어진 회랑을 의미하며 도시 한가운데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터인 아고라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을 의미합니다. 이 곳에서 철학자들이 모여서 다양한 견해들을 교환했다고 해서 “스토아 학파”가 유래되기도 하였습니다.
베데스다의 두 개의 저수지에 있었던 다섯 개의 회랑과도 그 구조면에서 비슷합니다. 두 개의 저수지 사이에는 폭 6m의 분리 벽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의 모양은 한자로 “날 일(日)”자 모양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두 개의 저수지 가장자리에 회랑이 있었다면 사이의 분리 벽에 있었던 회랑까지 합해서 모두 다섯 개의 회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저수지 사이에 있었던 분리벽 아래쪽에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통로가 발견되었습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북쪽 저수지로부터 물이 남쪽 저수지로 흐르게 만들어 놓은 통로입니다. 북쪽 저수지에 일정한 양의 물이 찰 때마다 병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남쪽의 목욕장으로 흘려보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장치 때문에 가끔 물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데 사람들은 천사가 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왜 베데스다에는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학자들은 그리스-로마 시대 도시들에 널리 퍼져 있었던 종합병원 “아스클레페이온(Asclepeion)”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스클레페이온(Asclepeion)”는 그리스에서 BC 700년경부터 “의학의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는데, BC 6세기에는 Asclepeion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클리닉이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목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치료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스클레페이온 신전의 한 가운데는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대와 저수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피부병의 경우 진흙 맛사지를 받게 하였고 태양볕 아래 맨발로 걷는 것도 중요한 치료 방법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음식요법으로서 포도주나 기타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기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금식을 치료 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발굴을 통하여 알려진 바로는, 베데스다의 유적은 BC 200년경 최초로 건설된 것이라고 합니다. AD 1세기에는 저수지와는 별도로 깨끗한 물을 받아서 마실 수 있는 급수대도 설치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이 저수 시설은 단순히 성전 제사를 위하여 제물을 깨끗이 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몸을 깨끗이 씻음으로써 병든 몸을 치료하는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Bethesda)”는 히브리어로 “Beth hesda (בית חסד/חסדא)”인데,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의 이름에서 치료에 관련된 의미도 발견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 의하면 AD 2세기에 “폼페이아 루킬리아”라고 불리는 한 로마 여인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몸이 회복되었는데, 그때 그녀는 고마움의 표시로 기부금을 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AD 5세기 중엽에 이곳 베데스다를 방문하였던 한 순례자는 이곳에 예수님이 38년 된 거지 못하는 환자를 치료하였던 일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를 “불구자의 교회”라고 불렀던 순례 기록이 남아 있으며, AD 6세기 부터 이곳이 성모 마리아의 생가였다고 하는 전승이 생겨났는데 이곳의 다섯 행각 중의 한 곳에 이러한 것을 기념하는 교회당이 건설되었습니다. AD 1100년경 십자군들은 이곳에 마리아의 모친을 기념하는 성 안나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당은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십자군 시대의 건축물로 남아 있습니다.
(요 5:16)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베데스다에서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율법 위반을 문제 삼아 예수님을 비난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의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가장 엄격한 안식일 율법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이 좌우된다면 예외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진 것을 구해내는 일은 “울법의 예외 조항”에 속하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물웅덩이에 양이 빠져서 죽었을 경우 사람들이 더 이상 그 물을 마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8) “그 무렵,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다윗과 그 군사들이 굶주렸을 때에 했던 일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자신도 먹을 수 없고 그 부하들도 먹을 수 없으며,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 너희가 또한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만큼은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성경(Canon, 정경)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성 요아킴(Joachim)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하여 기록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위경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중에서 AD 170~180년경 기록되어진 “야고보 복음서”는 마리아의 부모와 마리아의 탄생에 대하여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 이 내용들과 가톨릭이 인정하고 있는 몇몇 외경과 전승을 바탕으로 5세기 말부터 이곳이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의 집이 있었던 곳이라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는 안나와 요아킴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예루살렘 성전과 가까운 “양의 우물”에 인접한 곳에서 탄생했다고 하는 전승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마리아 탄생교회”(오늘날의 성 안나 교회)를 건립하고, 교회 건립 기념일인 9월 8일을 성모 마리아의 탄생일로 여겨 왔던 것입니다.
그 후 이 교회당은 페르시아 군대에 의하여 파괴 되었지만, 1140년경 십자군의 볼드윈 1세의 부인이었던 아르메니아의 여왕 아르다(Arda)는 수도원에 자금을 기부하고 두 개의 교회당을 짓도록 하였는데, 그때에 이 교회당이 건립되었습니다. 성 안나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태어난 동굴 위에 지어진 교회당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낳은 안나(Sta. Anna)에게 봉헌한 교회로서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교회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 양식이라고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교회당입니다. 특히 고딕식 둥근 지붕이 아름다우며, 음치가 노래를 해도 천상의 소리로 들릴 정도로 아름다운 음향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교회당이기도 합니다. 또한 십자군들은 베데스다 연못 위에 예수님의 기적을 기억하는 작은 교회당과 예수님의 생모,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하는 기념 교회당 근처에 거대한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성 안네 교회 바로 옆에는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걷지 못하였던 사람을 치료하는 이적을 행하셨던 “베데스다 연못”의 유적이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던 이 교회당의 지붕은 십자가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중앙 제단 우측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그곳으로 내려가면 성모 마리아의 부모가 살았었다고 전해지는 동굴 집이 있습니다. 교회 내부의 아치형 주랑은 십자군 시대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교회당 천정의 공명(共鳴)은 예루살렘의 여러 교회들 중 가장 아름답게 들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내 울림이 매우 좋아서 화음으로 찬양을 할 때 매우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베데스다(Beth-hesda(house of mercy)) 연못
스데반 문(Lion Gate)에서 예루살렘 성 안쪽으로 약 100m 쯤 들어가면, 오른 편으로 성 안나 교회가 있고 그 교회당의 입구를 지나 계속해서 들어오면 베데스다 연못의 유적을 정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다마스커스 문 쪽에서 들어온다면 게이트의 왼쪽에 있는 두 갈레 길에서 왼쪽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카레라이스와 피자와 비슷한 음식을 파는 아랍 식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맞은편에 골목길을 따라 가면 왼쪽으로 성 안나 교회의 입구가 있습니다.
베데스타 연못 앞에 서게 되면 폐허처럼 보이는 건물의 벽들과 기초 돌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기념성전 끝에는 베데스다 연못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을 내려가면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좁은 지하 동굴과 같은 곳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곳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계단으로 따라 내려가면 지금도 물이 조금 고여 있는 물 저장소가 나옵니다. 이곳의 벽에 회칠을 하여 물이 세어나가지 않게 한 후 물을 저장했던 곳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물 저장소 물 저장소로 내려가는 계단
이 연못은 자연적으로 땅속에서 샘이 솟아 연못이 된 곳이 아니라,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물을 저장하였던 곳입니다. 원래는 커다란 연못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이 파괴될 때 무너졌었다가 AD 5세기 비잔틴 시대에 재건되었던 연못입니다. AD 614년 페르시아에 의하여 다시 파괴되었고, AD 11세기 십자군 시대에 재건되기도 하였던 저수조와 같은 연못입니다.
지금의 연못 유적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이 못(Pool)은 솔로몬 성전 때부터 예루살렘 성에서 사용되는 물을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7:3), (열왕기하 18:17)에 의하면 못(Pool)이 아래 못과 위 못, 두 곳이 있었습니다.
BC 2 세기에는 성전에 물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어 확장하면서 두 곳의 못을 연결하였고 그 주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요한복음 5:2)에서 언급되었던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 측면에는 다섯 개의 회랑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7:3)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세탁자의 들판’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윗 못으로 흐르는 물길 끝으로 가서 아하스를 만나라.”
(열왕기하 18:17) “앗시리아 왕이 군대 장관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를 큰 군대와 함께 라기스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며 히스기야 왕을 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윗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길 곁에 멈추어 섰습니다. 윗 연못은 ‘빨랫집 밭’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습니다.”
이집트 북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 AD 231년에 두 개의 쌍둥이 베데스다 연못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연못 가장자리에 4개가 서 있었고, 중앙에 한 개의 기둥이 서 있었다.”고 설명하였는데, 이때 그는 사도 요한이 전하고 있는 “다섯 행각”에 관하여 설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2 개의 베데스다 연못 중의 하나는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로 드려졌던 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씻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곳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고대로부터 종교적, 의학적 목적을 위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특히 연못 동쪽에는 BC 150년경부터 AD 70년경까지 욕실과 병실 등이 지어져 있어서 병든 사람들을 위한 치료소로 활용되어 왔었습니다. 원래 베데스다 연못은 키드론 계곡에서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공급하였고, 빗물을 저장하여 제물로 사용되는 양을 깨끗이 씻던 저수조였으나, 못의 물이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못 주위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들었던 곳이었습니다. 특별히 동쪽에 있는 연못은 BC 150년에서 AD 70년 사이에 치유와 종교적인 목적으로 욕실과 동굴들이 만들어져 대중적인 치료센터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베데스다 연못은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에게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의미가 큰 곳입니다. 이 연못은 AD 1세기경부터는 수자원뿐만 아니라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치유와 정화의 원천이었습니다. 이 연못은 BC 516년부터 AD 70년까지 예루살렘의 제2 성전 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고대 도시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제사 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적 정화에 사용되었을 물의 공급을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은 다양한 종교 의식, 특히 유대교 성전에서 행해지는 정결의식에 필수적인 요소이었습니다.
이 물을 저장하는 웅덩이는 도시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일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정화와 실용적인 용도라는 두 가지 기능은 베데스다 웅덩이가 제 2성전 시대에 예루살렘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발굴을 통하여 석조로 된 포장된 고대의 길, 기둥, 건물 조각과 같은 유적들이 발견되어 다양한 시대에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건축 양식과 배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도자기와 동전과 같은 많은 유물들 이곳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러한 발굴품들을 통하여 이 유적지의 연대를 추정하고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요한복음 5장)에 따르면, 베데스다 연못(Pool)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여 38년 동안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였던 사람을 고친 곳으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그 남자는 물이 움직일 때까지 연못가에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연못의 물이 움직인 후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에 대한 기록은 다리가 마비되었던 사람이 회복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시자 그 사람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일이 있었던 날이 유대교의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인식일 법을 범하는 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큰 논란의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요 5:1~13) “얼마 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근처에 기둥 다섯 개가 있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 곳에는 병약한 사람, 앞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거기에 삼십팔 년 동안, 병을 앓아온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가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낫기를 원하시오?” 병든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제가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저보다 앞서서 물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 그 즉시, 그 남자는 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그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병이 나은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 안식일에 당신이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오.”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를 고쳐 주신 분이 나에게 ‘침상을 들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라고 유대인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자기를 고쳐 주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군중 속으로 사라진 뒤였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시간과 수많은 사건들을 겪어 오면서 이 베데스다 못은 여러 번 조성되고 개축되면서 계속 변하여 왔습니다. 기원전 8세기 때부터 있었던 것을 기원전 3세기경에는 하나의 연못을 더 만들어서 남북으로 두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연못은 본래 BC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졌던 길이 100 ~110m, 너비 62 ~ 80m, 그리고 깊이 7 ~ 8m의 연못으로서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인 목적과, 의학적인 치료의 목적을 가지고 2개의 연못으로 건설되었습니다. 특히 이곳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환자들이 이곳에 늘 모였던 장소였고,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로서 성스러운 성지로 지켜져 오던 곳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당시에는 연못의 폭이 50m, 길이가 150m 이었고, 깊이가 13~15m 정도로 깊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작은 우물로만 보이는 이곳이 바로 그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수세기 동안 베데스다 못은 그 기원과 목적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함께 많은 논쟁과 추측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못이 로마 목욕탕이었다고 믿기도 하였습니다.
AD 134년경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2차 항쟁을 진압하였던 로마의 황제 아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 성을 “엘리아 키피톨리나”라고 개명하고 베데스다 연못 위에 로마의 “치료의 신”인 Esculapio를 위한 신전을 건축하였던 것이 고고학 발굴의 결과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AD 5세기에는 로마의 이교도 신전이 세워졌던 자리에 비잔틴 교회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북쪽의 넓게 자리한 곳에 위치하였던 교회당의 발굴 작업 중 바닥에 화려하게 장식한 십자가의 모자이크가 발견 되었는데 이것은 비잔틴 교회당이 AD 427년 이전에 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AD 427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다스리던 그때까지는 거룩한 십자가를 바닥에 장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거룩한 십자가 문양을 바닥에 장식하게 되면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 있기 때문에 바닥 장식을 할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이 비잔틴 교회당은 AD 614년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파괴 되고 말았습니다.
AD 11세기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치유 기적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잔틴 성전의 폐허 위에 작은 기념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비잔틴 시대에 세워졌던 성전의 그 골격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기념 성전 건축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이 연못은 수 백 년 동안 흙으로 덮여져 있었던 곳이었으나 고고학 발굴 작업은 1871년~1888년부터 서서히 빛을 보게 되었다가 1954년과 1957년에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지어졌던 성전의 골격들이 이때의 발굴 작업을 통하여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깊은 연못 위에 건물을 지탱하기 위한 버팀목으로 세워진 웅장한 돌기둥의 폐허들이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유적으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1860년~1870년에 촬영된 베데스다 연못
이 연못의 이름은 2 가지가 있는데 기독교의 개신교에서 부르는 이름은 “베데스다(Bethesda)”이고, Roman 가톨릭에서는 “벳자타(Bethzatha)”라고 부르는 비슷한 이름으로 2 가지입니다. “베데스다”는 고대 아람어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어원상으로는 “자비의 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가하면 이곳으로 갈 수 있는 성문인 “스데반 문”이 다른 이름으로 “양 문”으로도 불렸기 때문에 그 옆에 있었던 베데스다 연못을 “양의 못”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시간) 월요일~토요일 08:00~12:00, 14:00~18:00(겨울에는 17:00까지) 일요일은 휴무.
(입장료, St. Anne Church & Bethesda) Adults: 12 NIS Students: 10 N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