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시온 산(Mount Zion)과 관련이 있는 그밖의 성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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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on 산과 관련이 있는 그 밖의 성지

최후의 만찬 수도원

AD 335년 골고다와 예수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묘 교회”가 지어지기 전까지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였던 곳이었습니다. 로마의 Constantinus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었던 AD 4세기 초, 시온 산위에 지어졌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당은 AD 614년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 “최후의 만찬 기념교회”가 서 있게 되었지만 이곳도 다시 이슬람에 의해 파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 버려져 있었던 이곳을 나폴리의 왕이 1333년에 이집트 술탄으로부터 매입한 후, 가톨릭의 프란체스코회 작은형제회는 이 부지에 수도원과 2층으로 된 고딕식 양식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작은형제회는 그곳을  “최후의 만찬 기념교회(Coenaculum)”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이 수도원을 2백여 년 동안 프란체스코회 작은형제회의 본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기념 교회는 1551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마침내 이곳은 이슬람의 사원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수도원 건물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 손으로 넘어갔고, 전승에 의하여 1층에는 다윗의 무덤(가묘)과 유대인 회당과 탈무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던 2층의 다락방은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최후 만찬 교회만을 개방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신 날인 성목요일과 성령강림이 있었던 일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주일에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St. Andrews Church (St. Andrew’s Scottish Protestant Church)

제 1차 세계대전 중 이 지역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영국 군인들(Scottish soldiers)을 기념하기 위해서 Clifford Holiday라는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영국의 개신교의 St. Andrew’s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1927년 교회의 머릿돌을 세우는 기공식이 있던 날에는 예루살렘 성을 이슬람으로부터 해방시킨 영국의 Allenby 장군이 참석하였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12월 9일, 영국의 Allenby 장군과 영국 군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인하여 730년 동안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영국은 1927년 5월 7일 이곳에 교회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Scotland의 상징인 Andrew’s 십자가(X-form cross, Scottish “Saltire”)를 종탑 위에 세워 놓았습니다.

1329년 The Scottish King(Robert the Bruce)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는데 그 때에 왕은 자신의 심장을 예루살렘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의 유언을 받았던 Messenger도 그때에 그곳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왕의 유언은 Scotland에 전하여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의 시신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스페인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 St. Andrews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 The Scottish Robert the Bruce 왕을 기념하여 교회의 바닥에 작은 동판 하나를 새겨 놓았습니다.

The Sultan’s pool (술탄의 연못)

처음에는 오토만 제국의 술탄이 “술탄의 연못”을 건설할 때, 예루살렘 성과 시온 산 아래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에 둑을 쌓아서 67 m X 169 m X 12 m의 크기로 건설하였습니다. 물은 골짜기로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받아서 저장하는 방식으로 물을 저장하였으며, 예루살렘으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헤롯 대왕 때에 베들레헴 근처에 있었던 “솔로몬 못(Solomon’s pools)”으로부터 성전 산으로 물을 끌어오기 위하여 건설되었던 로마식 수로(23 km의 길이의 lower aqueduct)가 “술탄의 연못” 부근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오토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을 때 흙을 구워서 만든 파이프 관을 사용하여 수로를 보강하면서 “술탄의 연못(Sultan’s Pool)”을 건설하였습니다.

 

힌놈의 아들 계곡(valley of the son of Hinnom)은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으로 받은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 온 후, 12 지파가 각각 그들의 영토를 배정받을 때,  베냐민 지파(수 18:16)와 유다 지파의 (수 15:8)의 경계선이었던 곳이었습니다.

(수 15:7~8) “북쪽 경계는 아골 골짜기를 지나 드빌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길갈로 이어집니다. 길갈은 아둠밈 산으로 가는 길의 맞은편에 있는데 아둠밈 산은 골짜기의 남쪽에 있습니다. 경계는 엔 세메스 물을 따라 이어지고 엔 세메스 물은 엔 로겔에서 그칩니다. 거기에서 다시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그 곳은 여부스 성의 남쪽에서 가깝습니다. 그 성은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거기에서의 경계는 힌놈의 골짜기의 서쪽 언덕 꼭대기입니다. 그 곳은 르바임 골짜기의 북쪽 끝에 있습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지나 베들레헴으로 갈 수 있는 길인 “헤브론 길” 위에 1536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 술레이만 대제가 건설하였던 Sebil(수로를 통하여 물을 공급한 분수)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오스만 터키의 Sultan 술래이만 대제는 예루살렘 성을 새롭게 확장하여 건설하였던 술탄(왕)이었는데, 이 때 “술탄의 연못”을 따라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많은 “Sebil(수로를 통하여 물을 공급한 분수)”을 건설하였습니다. 이 Sebil에는 “이렇게 마실 물을 제공한, 위대한 왕이며 주인이신 술탄 셀림 칸의 아들, 술탄 술래이만의 나라를 알라 신이 영원하게 하실 것입니다.” 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습니다.

 

아겔다마 (Akeldama, Hakel-dema)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저질렀던 엄청난 잘못을 깨닫게 되었던 가룟 유다(Juda Iscariot)는 예수님을 배반하면서 그 대가로 받았던 은돈 서른 개를 성전 안에 내던지고 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곳을 “피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3-10)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은 삼십 개를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유다가 말했습니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기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너의 문제다.” 유다는 은화를 성전 안에 내던지고 나가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성전에서 그 돈을 거두고 말했습니다. “이 돈은 피 값이니, 성전에 두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 나그네들의 묘지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밭은 지금까지 피밭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한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은화 삼십 개,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몸값이라고 정한 값을 받았다. 그리고 토기장이의 밭을 샀는데 밭 값으로 그 돈을 주었다. 이것은 주께서 내게 지시하신 그대로이다.””

(사도행전 1:15~19) “며칠 후, 약 백이십 명쯤 되는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유다에 관해 말씀하신 것 중에,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다는 우리와 행동을 같이했던 사람이며, 우리처럼 사도직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밭에서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창자가 밖으로 나온 채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밭을 자기들 말로 ‘아겔다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겔다마’란 ‘피의 밭’이란 뜻입니다.”

“하켈 드마(Hakel dema)”라는 말은 아람어로써 “피밭”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힌놈 아들의 계곡(Gehenna)이 끝나는 지점인 서남쪽에 있는 실로암 연못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그곳은 바위가 있는 곳에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수녀회인 “하켈 드마 수도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수도원 안에는 바위를 파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지하 무덤들을 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이곳은 고대 다윗 왕 시대 이전부터 무덤으로 사용되어온 바위 무덤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십자군 시대에는 이곳에 성 마리아 성당이 지어졌고, 그 후 이곳은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도중에 죽은 순례자들을 묻는 곳이 되었습니다. 바위 무덤 안에는 중세 순례자들의 해골과 뼈들이 남아 있습니다.

1874년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은둔하면서 수도하였던 이집트의 수도사, 오누프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이곳에 “성 오누프리우수(St. Onuphrius)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현재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과 관련된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 하고 난 후 예수님이 체포되자 두려움에 떨며 도망갔던 다른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이라 하여  이곳을 “사도들의 동굴”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힌놈의 골짜기( 또는 “Valley of (the sons of) Hinnom” 또는 “Gehenna”라고 불렸던 이곳은 예루살렘 성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며 나있는 비교적 넓은 골짜기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각 지파대로 땅을 배정받을 때, 유다 지파의 땅으로 배정을 받은 지역에 있었던 곳입니다.

유다 왕 요시아는 이곳에서 자녀를 불에 태워 몰록에게 제사하는 이방인의 제사 방법으로 제사 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왕 아하스는 이곳에서 자녀를 불살라 몰록에게 제사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대하 28:1~3) “아하스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이십 세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달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나쁜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하스는 이스라엘 왕들의 죄의 길을 그대로 따라, 쇠로 우상들을 만들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향을 피웠고, 자기 아들까지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쫓아 낸 다른 나라들의 역겨운 죄를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이곳에 도벳 사당을 짓고 그 자녀를 불사르려고 하니 장차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일컬을 날이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의 이름을 “와디 엘라바비(Wadi er-Rababeh)”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7:30~32)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다 백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악한 짓을 했다. 그들은 내가 예배를 받으려고 정한 성전에 역겨운 우상들을 세워 놓고 그 성전을 더럽혔다.  유다 백성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산당을 지어 놓고 자기 자식들을 불살라 제물로 바쳤다. 그것은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니며 그런 일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경고한다. 사람들이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살인 골짜기(죽임의 골짜기)’라고 부를 날이 올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묻을 곳이 없을 정도로 그 곳에 시체가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역대하 33:5~6) “므낫세는 여호와의 성전의 두 뜰에도 별들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들들까지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요술과 마술을 부렸으며, 표적과 꿈을 풀어서 점을 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무당과 점쟁이를 불러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악하다고 하신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노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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